낱말의 발음이 비슷한 욕설 때문에 오해도 있을 수 있다.
始發, 우리는 다시 한 번 ‘시작’해야 하는 숙명에 놓여
[뉴스엔뷰] 맨 처음으로 출발함, 영어로 The first departure로 번역된다. ‘시발(始發)’
이 낱말을 생각하면 발음이 비슷한 욕설 때문에 오해도 있을 수 있지만, 필자는 우선 지난 1955년부터 1960년대까지 약 200여 대가 생산되었던 신진공업사의 ‘시발자동차’를 떠올리게 된다.
6·25 전쟁 직후 미군이 쓰던 군용 지프 부품에 드럼통을 두드리고 펴서 만든 대한민국 최초의 국산자동차가 생각나는 것이다.
당시 기술자 최무성의 이 같은 시도가 현재 대한민국이 세계 굴지의 자동차 생산국으로 발 돋음 하는데 ‘시발(始發)’이 된 것이다.
때문에 ‘시발(始發)’이라는 낱말이 ‘최초의 시작’의 의미일 때 필자는 숙연해지고 그 낱말이 숭고하게 느껴지며 앞으로 닥쳐 올 어떤 어려움도 감내하겠다는 각오가 느껴지는 것이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 최초의 길, 때문에 두렵기도 한 길을 시작하는 이들의 어깨에서 느껴지는 비장함에 가슴을 저리며 머리카락이 치솟기도 한다.
사람의 연상 작용이랄까. 길을 생각하니 문득 조선말 불우한 천재시인 ‘김삿갓’ 김병연이 생각난다.
홍경래의 난 때 선천 부사였던 조부 김익순이 항복을 했었던 상황과 이후 과거에 응시한 김병연이 조부 김익순의 행위를 비판하여 급제하였던 일로 하늘을 올려볼 수 없는 죄인이라며 삿갓을 쓰고 방랑 생활을 하게 된 그의 행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전국을 방랑하며 읊던 칠언절구의 풍자와 해학이 그리고 그의 씁쓸하고 쓸쓸한 뒷모습이 그려지는 것이다.
때로는 필자도 그의 풍자와 해학의 뒤꿈치라도 건드려가며 끄적이고 싶으나, 한문(漢文)이나 당시(唐詩), 송사(宋詞), 원곡(元曲) 등의 중국문학을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문외한(門外漢)이다보니 언감생심일 뿐이다.
‘생각’은 나는 새와 같은 것인지 이 가지에 앉았다. 또 금방 저 가지로 날아가 앉는다. 그러다 컴퓨터에 ‘시발’을 입력하자 그야말로 경이로운 일이 눈앞에 펼쳐지는 게 아닌가.
그것은 바로 始發奴(시발노) 無色旗(무색기)와 관련한 언어의 난잡한 작위가 그럴싸하게 꾸며져 있었던 것이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이렇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람이나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마구 행동하는 사람을 옛사람들은 시발노무색기(始發奴無色旗)라는 말을 하였다.”라며 “복희씨가 중국을 다스리고 있던 중국의 이야기”라고 거창하게 중국역사와 고사성어의 날조를 시작하는 설화를 전개하고 있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적으면 “어느 날, 태백산 한 산마을에 돌림병이 나서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는 전갈을 들었다. 그리하여 복희씨는 그 마을로 향하게 되었는데, 그 마을은 황하의 물이 시작하는 곳이라 하여 시발(始發)현(懸)이라 불리우고 있었다.
그 마을에 도착한 복희씨는 돌림병을 잠재우기 위해 3일 낮 3일 밤을 기도했는데 3일째 되는 밤 기도 도중 홀연 일진광풍이 불면서 왠 성난 노인이 나타나 “나는 태백산의 자연신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몇 년 째 곡식을 거두고도, 자연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 이를 괘씸히 여겨 벌을 주는 것이다.. 내 집집마다 피를 보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하였다. 복희씨는 자연신이 화가 난 것을 위로하기 위해 방책을 세우고 마을사람들을 불러 모아 말하였다. “자연신의 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집집마다 깃발에 동물의 피를 붉게 묻혀 걸어두어야 하오!” 그런데 그 마을 사람 중에 시발현의 관노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귀신은 본디 깨끗함을 싫어하니, 나는 피를 묻히지 않고 걸 것이다” 하고 붉은 피를 묻히지 않은 깃발을 걸었다.
그날 밤 복희씨가 기도를 하는데 자연신이 나타나 노여워하며 말하길 “이 마을 사람들이 모두 정성을 보여 내 물려가려 하였거늘, 한 놈이 날 놀리려 하니 몹시 불경스럽다. 내 역병을 물리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다음날부터 전염병이 더욱 돌아 마을사람들이 더욱 고통스럽고 많은 이가 죽었다고 한다. 이는 그 마을(시발현)의 한 노비가 색깔 없는 깃발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로 인해, 그 이후 혼자 행동하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람이나,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마구 행동하는 사람을 보면 ‘시발노(始發奴)무색기(無色旗)’라고 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더 찾아보니 “국내 1위를 표방하는 신문의 자회사의 데스크칼럼에도 이 내용이 중국의 고사성어인 양 소개되었다며 큰 논란을 일으켰다”고 한 신문에 보도된 기사도 눈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이 ‘시발노 무색기’가 그 이전부터 신문에 기사로 등장하였다면서 한국 언론의 고질적 병폐인 ‘베껴쓰기’의 폐해라고 적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여기서 머무르질 않는다. 얼마나 辱(욕)하고 싶었을까 생각도 든다. 사실만, 사실에 근거한, 품위를 갖춘, 대중에게 영향을 지대하게 끼치는 언론에서 ‘욕’은 더욱 더 금기 사항이다.
하긴 메이저 언론의 대명사로 통하는 한 신문이 과거 4월 1일 ‘만우절특집’으로 보도한 소설가와 대학교수의 가상의 난투극이 화제를 모은 적도 있지만 욕은 여하튼 금기사항이다.
그러면서도 현 상황을 바라보는 필자는 입이 간지럽다. 입안에 날개가 돋으려나 생각도 한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시발노 무색기’에 대한 거창한 역사와 고사성어의 왜곡을 허락해 준 그 필자에게 고마운 마음도 든다.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이리저리 날다 보니 역사의 수레바퀴를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를 헛소리가 난무하고 있다.
분명한 건 始發(시발)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시작’해야 하는 숙명에 놓인 백성이다. 역사의 물길은 장강의 물결처럼 도도히 흐를 것이다. 백성의 뜻이 하늘에 닿기를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