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중국 절강성 난계 출생, 1940년 2월 상해 외곽에서 총살로 만 22세 생을 마감

[뉴스엔뷰] 정평여(19181940)1930년대 중일 전쟁기에 중국 국민당의 정보기관인 중앙집행위원회 조사통계국(중통) 소속의 여성 첩보원이다.

일반에는 이안 감독의 영화 <, (, )>에서 탕웨이가 맡았던 '왕치아즈, 막부인'의 모델이 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정평여는 1918년 중국 절강성 난계에서 2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정월은 일찌기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철도학교를 졸업하고, 손문을 추종해 도쿄에 창설된 정치결사체인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에 가입해 활동하는 등 정치지향적 성향이었다.

여기서 법정대학 법학과를 다니던 시절, 어머니 기무라 하나를 만나 결혼해 1916년 귀국한다. 아버지는 훗날 강소성 고등법원에서 수석 검찰관을 지냈다.

이런 집안에서 나고 자란 정평여는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일본어에도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1932년 상해의 명광중학 고등부에 다니게 된다. 일각에 따르면 이때 학교 이사장이 후에 숙적으로 만나게 되는 정묵춘(丁默邨)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일찌감치 안면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당시 정평여에게는 총명한 두뇌 말고도 남들과 비교되는 두드러진 특징이 있었는데, 그것은 빼어난 미모였다. 이로 인해 그녀는 상해에서 발행하는 '좋은 친구(良友)'라는 화보잡지의 표지모델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항일운동에 뛰어들게 되고, 이 과정에서 일본 총리인 고노에 후미마로의 아들 고노에 후미타카를 알게 된다.

정평여가 어떻게 정보기관에 소속됐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빼어난 미모와 총명한 두뇌는 그녀의 치명적 무기였으며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게 되는 원인이 됐다.

고노에 후마타카도 이런 점에 끌려 정평여와 친분을 맺게 되지만 19396월 후미마로 총리에 대한 암살미수 사건이 발생해 요인들의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일본이 후미타카를 본국으로 송환하면서 둘의 관계는 끝나고 만다.

이후 8월 국민당의 실력자 중 한명인 왕정위(汪精衛)가 대일 평화 성명을 발표하고는 남경에 친일 괴뢰정권을 수립하자, 일본이 이를 합법정부로 인정하면서 정세가 요동쳤다.

또한 왕정위는 상해 제스필드(Jessfield)76호에 특무본부를 차리고, 국민당 중앙특무위에서 특공총부(特工總部)를 이끌던 정묵춘에게 지휘를 맡겼다.

이런 상황에서 장개석 측 중통은 정평여를 중용하며 침투 및 처단 공작을 계획한다.

중통이 갖고 있던 정보에 따르면 정묵춘은 여자를 매우 밝혔으며, 중통은 빼어난 미모의 정평여를 접근 시키는 이른바 '미인계'를 기획했다.

예상대로 정묵촌은 그녀의 미모에 반해 빠져 들었다. 이윽고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중통은 "정묵촌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1221일 상점으로 유인해 살해하는 암살계획을 실행하게 되지만 작전 책임자가 도리어 정묵촌의 첩보망에 걸려들어 실패한다. 이로 인해 정평여와 동료 공작원들의 신분도 탄로나 체포됐다.

그녀는 19402월 상해 외곽 호서구 중산로로 연행돼 만 22세에 총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정평여가 소속됐던 중앙위 조사통계국은 대만으로 건너가 중화민국 법무부 조사국(MJIB)으로 개편돼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그녀를 특무열사(特務烈士)로 인정해 활약을 기리고 있다. 자료제공 / 박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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