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소에서 엔돌핀 같은 행복호르몬이, 불행한 소에서 스트레스 호르몬 같은 불행 호르몬이 나와서 그걸 먹는 인간의 건강도 좌우한다는 이론이 있다.

[제232호 뉴스엔뷰] 소하면 가축으로만 알지만 큰 동물들의 멸종이 가속화되는 현재에도 야생에 몇몇 야생소가 존재한다.

옛날 인디언들이 그들을 쫓아서 유목 생활을 했던 아메리칸 들소 바이슨, 유럽들소 버팔로, 아프리카의 불도저 아프리카들소 등등이 그들이다. 코뿔소는 소과는 아니지만, 그냥 소로 불리고 있다. 사실 하마가 소목(우제류)이고 코뿔소는 말목(기제류)이다. 모양과 습성이 비슷하여 이름에 재미있는 혼돈이 생긴 경우이다.

소는 인간이 길들인 역사가 오래된 동물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비교적 순한 야생 소를 잡아다 길들이기 시작해서 오늘날의 소가 됐다. 사진/픽사베이.
소는 인간이 길들인 역사가 오래된 동물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비교적 순한 야생 소를 잡아다 길들이기 시작해서 오늘날의 소가 됐다. 사진/픽사베이.

소는 길들인 역사가 무척이나 오래된 동물(BC 7000~8000년경)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비교적 순한 야생 소를 잡아다 길들이기 시작해서 오늘날의 소가 되었다.

소의 겁이 많고 먹을 것에 약하며 방어적인 성격을 잘 이용한 것이다. 고통에 둔감하고 충격에 무딘 성상도 한몫했을 것이다. 소는 인간에게서 편히 먹고사는 안전을 보장받았고, 인간은 그를 충분히 먹여 살린 후 고기와 우유와 그의 강대한 힘을 얻어냈다.

그럼 소는 행복했을까

글쎄 사는 동안은 인간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고 어쩔 수 없어 죽을 땐 최대한 안락사나 자연사를 보장받았다. 삶과 죽음 사이에 서로 주고받는 관습적인 계약이 있었다. 

흔히 도축장에 들어갈 때 소가 운다고 한다. 그것은 재산의 한 축이었고 사는 동안 식구였던 우리 정서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온 말이다. 진실을 굳이 따질 필요는 없다. 수많은 도축을 지켜본 바로는 소는 웬만해선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자기가 죽을 운명인 줄도 잘 모른다.

끝까지 인간에게 순하게 굴다가 정수리에 ‘건’이라 불리는 송곳총을 한 방 맞고 그대로 기절해 떨어질 뿐이다.

도축 과정은 일순 잔인하게 보여도 사실 굉장히 숙연하고 진지하게 이뤄진다. 거기선 누구도 희생양인 소에 대해 함부로 무시하거나 심하게 대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보면 전쟁 중 인간을 처형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지만, 도축은 차라리 그보다도 훨씬 더 인간적으로 보인다.

쥐가 소보다 앞선 이야기는 십이지신의 띠를 이야기할 때마다 회자된다. 왜 쥐가 소보다 앞이야? 그건 영리한 쥐가 우직한 소를 타고 와서 결승선에서 먼저 뛰어내렸기 때문이다.

이것도 알고 보면 ‘사기’지만 신화나 현실은 사실 사기 치고 사기당하는 이야기가 기본이다.

단군신화의 곰과 호랑이 설화에서 100일 동안 호랑이에게 풀을 먹으라 하는데, 어떻게 초식성인 데다 100일 동안 겨울잠을 자는 곰과 경쟁이 된단 말인가? 이건 완전히 불공정 게임이지만 패(권력)를 쥔 사람(신) 마음인 것이다.

가축소도 젖소, 육용소, 사역소로 구분된다. 젖소는 젖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반드시 새끼를 낳아야 젖이 나온다. 한우를 포함한 육용소의 수컷들을 거의 다 거세시켜야 육질을 보장받는다. 그들의 그 크고 작은 희생으로 오늘날 인간의 풍부한 삶이 유지되는 것이다. 

12년을 지나 다시 돌아온 소의 해를 맞아 또 한 번 그들의 희생에 돌아보며 앞으로 유기축산이나 육식 덜 하기 운동이 더욱 확산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우선 가축화된 소의 숫자를 줄여 그들의 소 다운 삶을 보장해 주어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두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서로 이끌어주어야 한다.

행복한 소에서 엔돌핀 같은 행복호르몬이, 불행한 소에서 스트레스 호르몬 같은 불행 호르몬이 나와서 그걸 먹는 인간의 건강도 좌우한다는 이론이 있다.

비록 생활에서 먼 가축일지라도 우리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자주 만나고 그 선한 눈망울을 가끔씩 떠올려 보는 것, 그들과 지속 가능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가장 쉽고 기본적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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