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밀면…배고픔과 그리움에 시작된 분단의 음식
‘조선 시대에도 냉면 배달’ 고종이 즐겨먹던 냉면
일제 강점기에도 사랑 받은 냉면, 서울에서 부흥기
메밀의 평양냉면…감자에서 고구마로 바뀐 함흥냉면

[뉴스엔뷰] 글자 그대로 ‘차가운 국수’라는 뜻의 ‘냉면’은 그저 음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다. 한국의 역사와 지역의 특성, 문화와 궤를 같이한다. 언제, 어떻게 한국인의 소울푸드 중 하나가 되었을까?

평양 옥류관에서 냉면을 나르는 봉사원들.  사진 / 뉴시스
평양 옥류관에서 냉면을 나르는 봉사원들.  사진 / 뉴시스

냉면은 여름 음식이다? N0!

기록에 따르면 우리 민족이 냉면이라는 음식을 먹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부터다. 냉면이 문헌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최초의 기록은 17세기 조선의 대문장가였던 장유의 문집 <계곡집(谿谷集)>의 시 한줄이다.

‘자줏빛 육수에 냉면을 말아 먹고’란 제목의 이 시에는 ‘노을빛 영롱한 자줏빛 육수(紫漿霞色映)/ 옥 가루 눈꽃이 골고루 내려 배었어라(玉紛雪花勻)/ 입 속에서 우러나는 향긋한 미각(入箸香生齒)/ 몸이 갑자기 서늘해져 옷을 끼어 입었도다(添衣冷徹身)’라고 묘사하고 있다. 혹자는 시에 등장하는 자줏빛 육수의 정체를 오미자즙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헌종 때의 학자 홍석모가 한국의 열두 달 행사와 풍속을 설명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겨울철 제철음식으로 메밀국수에 무김치, 배추김치를 넣고 그 위에 돼지고기를 얹어 먹는 냉면이 있다”고 기록됐다. 이는 냉면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나온 첫 번째 기록으로 평가된다.

조선 후기 궁중에서 왕족에게 진찬한 내용의 기록인 <진찬의궤(進饌儀軌)> 중 고종 10년(1873년)에는 “냉면 한 그릇(冷麵 一器:-목면(木麵:압착기를 이용한 면발) 30사리, 김치 5그릇(器), 돼지다리 3분(分 1부(部) 배 3개 (個),잣 5작(勺) 고춧가루 1합(合)”이라는 정확한 레시피까지 기록돼있다. 실제로 고종은 역대 조선의 왕 중 냉면을 가장 즐긴 것으로 유명한데, 그의 총애를 받던 삼축당(三祝堂)은 냉면 위에 올라가는 배를 칼로 썰지 않고 반드시 수저로 얇게 저며 얹었다고 기록했다.

냉면은 사실 조선시대부터 추운 겨울에 먹는 음식이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조선시대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에서 냉면 국수를 만드는 메밀이 재배됐는데, 음력 7월 초순에 심어 가장 늦게 수확했다. 그 당시 평안도 사람들은 한여름에 밀을 수확해 만두와 국수를 만들어 먹고, 겨울이 되면 늦가을에 추수한 메밀로 냉면을 만들어 먹었다.

슴슴한 맛이 베이스인 평양냉면은 기호에 따라 다양한 조미료를 첨가해 먹을 수 있다.  사진 / 픽사베이
슴슴한 맛이 베이스인 평양냉면은 기호에 따라 다양한 조미료를 첨가해 먹을 수 있다.  사진 / 픽사베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

냉면은 조선시대를 지나 우리 민족의 암흑기였던 일제강점기에도 사랑받는 음식이었다. 마침 메밀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 화전민의 주식이 되는 곡물이었다는 점도 냉면의 부흥을 이끌었다. 차가운 냉면의 최고는 겨울에 먹는 냉면인데 특히 동치미국물에 말아먹는 겨울냉면은 일품이라고 일제강점기 신문에도 소개될 정도였다.

일제시대부터 평양냉면이 유명해진 데에는 냉면의 원료인 메밀이 많이 생산된 평양에 외식할 수 있는 계층이 많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평양냉면은 평양에서 갈고 닦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서울로 진출했다.

문헌기록에서 장국냉면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던 하절기용 고기육수 베이스의 냉면이 20세기에 접어든 후 냉면의 대표 격으로 서울의 음식점에서 팔렸다는 기록은 일제강점기 신문, 잡지 등의 기사나 당시 생존인물들의 수필 및 회고담 등에도 남겨져있다. 기록에 따르면 서울에서 평양냉면을 판매하는 음식점 역시 이미 1920년대 초반에 존재했다.

1926년 12월 1일자 잡지 <동광>의 소설 중 김랑운의 <냉면>에는 “저육과 채로가신 배(梨)쪽과 노란 게 자를 우에 언즌 수북한 냉면 그릇”이라는 표현이 있다.

또 <매일신보> 1936년 7월 23알자 기사의 <냉면 반죽하는 솜씨 여하가 국수맛을 결정>앞부분에서는 서울 속 평양냉면 인기를 실감하게 한다.

“평양냉면, 해주냉면 다음으로 서울냉면을 손꼽을 만큼 이제는 서울냉면이 냉면 축에서 뻐젓하게 한몫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성냉면은 말하자면 평양냉면의 연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입 까다로운 서울사람들의 미각을 정복해보려고 평양냉면 장사들이 일류 기술자(냉면의 맛은 그 기술 여하에 달렸습니다)를 데리고 경성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움직일 수 없는 굳은 지반을 쌓아놓았습니다. 여름 한철 더군다나 각 관청 회사의 점심시간이 되면 냉면집 전화통에서는 불이 날 지경입니다.”

고종이 즐겨먹었던 배냉면.  사진 / 냉면 랩소디 스틸컷
고종이 즐겨먹었던 배냉면.  사진 / 냉면 랩소디 스틸컷

달 구경 하던 순조, 배달로 냉면 주문

<매일신보> 기사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평양냉면의 인기 뿐만 아니다. 냉면이 오래된 배달음식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는 조선시대 기록을 통해 냉면이 우리나라의 첫 번째 음식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도 있는데, 조선 후기 실학자 황윤석의 저서 <이재난고(頤齋亂藁)>에 따르면 영조 44년(1768) 7월 “과거시험을 본 다음 날 점심에 일행과 함께 냉면을 시켜 먹었다”라고 적었다.

문화재청은 궁중에서 즐기던 고급 요리인 냉면이 양반층에까지 인기가 높아지면서 배달까지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도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순조가 즉위 첫해인 1800년 군직과 선전관을 불러 달구경을 하다가 시장기가 돌았는지 냉면을 시켜 먹자며 당직 군사에게 대궐 밖에서 냉면을 사오라고 시켰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부흥했던 냉면은 분단을 기점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서울에 여전히 평양냉면 가게들이 남아있긴 했지만, 분단 후 평양냉면의 맛을 잊지 못한 실향민들은 남한 곳곳에 자리를 잡아 자신만의 냉면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평양냉면과 자주 비교되는 함흥냉면은 사실 함흥의 농마국수가 원조다. 농마는 녹두, 감자, 도토리 말린 가루 또는 전분을 뜻하는 북한 말인데, 농마국수는 주로 감자로 만든 국수를 가리킨다. 이 국수에 양념을 넣어서 버무려 담은 다음, 무김치(또는 배추김치)와 고기, 오이를 얹어서 모양을 내고 실고추와 달걀지단으로 고명해 육수를 부었다. 여기에 함경도 근해에서 많이 잡혔던 홍어, 가자미, 명태 등을 얹은 것이 회국수다.

밀면은 부산으로 피난간 실향민들의 애환이 담긴 음식이다.  사진  / 픽사베이
밀면은 부산으로 피난간 실향민들의 애환이 담긴 음식이다.  사진  / 픽사베이

독립적으로 탄생한 기방 음식, 진주 냉면

이 맛을 그리워하지만 먹기 힘들던 시절,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들이 속초 아바이마을 인근에 모여 해먹기 시작한 것이 바로 함흥냉면이다. 감자면 대신 고구마면으로, 홍어나, 가자미 대신 많이 잡히는 명태를 주로 사용하며 지금의 함흥냉면으로 발전했다. 따라서 함흥냉면이라는 음식은 지금 함흥에 없다.

평양냉면이 메밀로, 함흥냉면이 고구마면으로 만들었다면 또 다른 실향민 무리가 부산으로 내려가 만든 것이 바로 밀면이다. 감자면이나 고구마면 자체를 구하기 힘들었던 그들은 쉽게 먹을 수 있는 밀가루로 면을 내 말아먹었던 것.

그런가하면 진주 냉면은 완전히 독자적으로 탄생한 또 다른 음식이다. 1994년 북한에서 발행된 <조선의 민속전통> 식생활풍습 부분을 보면 “랭면 중 제일로 여기는 것은 평양랭면과 진주랭면”으로 기록됐다. 조선시대의 권번가에서 야참으로 즐겨먹던 고급 음식 진주냉면은 다른 냉면과 달리 죽방 멸치, 바지락, 마른 홍합, 문어 등의 해산물로 육수를 낸다. 또한 단순하면서도 정갈한 고명의 다른 냉면들과 달리 다진 배추김지, 쇠고기 육전, 오이, 지단 등의 화려한 모양새가 특징이다.

600여 년을 이어온 냉면의 역사. 거기에 담긴 분단의 아픔과 고향의 맛을 잊지 못한 실향민들이 만든 변주를 안다면, 좀 더 맛있게 냉면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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