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적의 포로가 되어 이들의 정보를 일본에게 전달하고, 조선인을 감시하는 등 일본에 충성스러운 모습들을 보인다. 한 역사학자는 이런 배정자의 모습을 보고 “뼈 속까지 일본인으로, 조선을 부정한 인물”이라고 밝혔다.

[뉴스엔뷰]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사망한 이토 히로부미에게는 양녀가 하나 있었다. 배정자. 그녀는 조선인으로 1870년 경남 김해 출생으로 밀양부 아전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가 민씨 일파에게 처형단한 후 연좌제의 의해 가족이 모두 관비가 돼 기생으로 팔려간다. 이후 1882년 그는 사찰에 맡겨져 여승이 되도록 승려 수업을 받았으나, 그곳에서 도망쳐 자신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정병하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배정자를 도운 정병하는 훗날 밀양 부사가 되는 데 그는 무역상 마츠오를 통해 그녀를 일본 오카야먀에 유학 가 있던 이토 히로부미의 식객 안경수에게 보낸다.

배정자의 모습. 사진/친일인명사전 갈무리
배정자의 모습. 사진/친일인명사전 갈무리

여기서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에 눈에 들었고, 다야마 데이코(田山貞子)란 이름으로 불린다. 훗날 그는 데이코란 이름 때문에 한국에서 배정자로 불리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미모와 명석함까지 갖춘 그를 수영, 승마, 변장술, 사격, 국제 예절 등을 가르쳤으며, 스파이로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1894년 배정자는 한국으로 귀국, 주조선 주재 일본대사관 하야시 공사의 통역사로 일하게 된다.

배정자는 공사의 일본어 통역자를 빙자하여 고종과 가까워지고, 고종은 그를 총애하며 궁 내에서 자주 만나는 행보를 보인다. 배정자는 러일전쟁과 관련해, 친러파가 고종을 평양이나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기는 계획을 듣고, 일본 공사에 전달해 이들의 계획을 무산시키기 까지 했다. 실제 1949년 발행된 <민족정기의 심판>은 “배정자는 고종이 무심코 내뱉은 발언을 흘려듣지 않고 일본공사관에 보고했다”면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과 친일파들의 죄목을 정리한 이 책에 따르면, 블라디보스토크 망명을 추진 중이던 고종이 배정자 앞에서 ‘내가 러시아에 가게 되면 정자도 동행하는 게 어떤가?’라고 물었고, 배정자의 보고를 받은 일본은 고종의 계획을 신속히 무산시켰다”고 전한다.

이후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히로부미가 사살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웠다고 할 만큼 배정자에게 이토는 절대적이었다. 이토 사망 후 배정자는 일본 헌병 사령관 아사키의 제안으로 만주와 시베리아로 떠난다. 그리고 마적의 포로가 되어 이들의 정보를 일본에게 전달하고, 조선인을 감시하는 등 일본에 충성스러운 모습들을 보인다. 한 역사학자는 이런 배정자의 모습을 보고 “뼈 속까지 일본인으로, 조선을 부정한 인물”이라고 밝혔다.

1927년 배정자는 공직생활을 마치고 은퇴하게 되는데 총독부로부터 6백여평읠 토지를 증여받고 월급을 받으며 지내게 된다. <친일인명사전>은 “3·1운동이 일어나자 하얼빈에서 조선인들을 설득해 일을 원만히 해결한 공로로 조선총독부로부터 1000원, 일본총영사관으로부터 600원을 기밀비로 받았다”, “1941년 태평양전쟁 개전 이후에는 조선 여성을 동원해 일본군 위문대를 조직한 후 남양군도에서 위문활동을 벌였다”고 전한다.

해방 후 그는 1949년 2월 서울 돈암동 자택에서 반민특위 특경대에 체포된다. 하지만 그해 4월 고령이라는 이유로 보석으로 석방되었고, 1952년 2월 27일 사망하게 된다.

역사학자는 이와 관련해 “배정자의 주 수입원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정보를 일본에 알려주고 받은 것들이 대부분”이라면서 “그는 죽을때까지 부유했고, 그의 자손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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