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준씨 역시 결혼과 출산으로 이어진 5년간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이명선씨 역시 결혼 직후 범죄를 멈춘다. 정규적인 노동참여 역시 범죄를 중단하는 요인이었다. 김성민씨는 ‘젊은 시절 식당에서 일했던 시기를 매우 보람있었다’면서 ‘당시에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고 회상한다.

[제 225호 뉴스엔뷰] 일흔을 넘긴 이성준(가명)씨는 22년간 교도소 생활을 했다. 1968년 소매치기를 시작으로, 2017년 마약유통으로 검거될 때까지 이씨는 12번 수감됐고, 20개의 전과를 가졌다.

범죄 성공경력을 통해 ‘어려움에 처하거나 돈이 필요할 때 범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그는 생애 전반에 걸쳐 범죄와의 인연을 끊지 못했다.

‘멈춤’의 시간은 있었다. 결혼과 출산 후 가정이 꾸려졌을 때다. 약 5년간 지속된 ‘멈춤’의 시기는 IMF가 닥치자, 범죄의 재시작으로 이어진다. 그는 이후 마약유통에까지 손을 대며, 수감 생활을 이어갔다.

<뉴스엔뷰>의 이번 취재는 박형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의 ‘고령범죄자의 범죄경력 연구’를 바탕으로 생애주기 동안 지속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의 ‘시작’과 ‘범죄 중단 시기’에 초점을 맞췄다.

박 연구위원의 이번 연구는 범죄경력 연구의 동향에 대한 문헌연구와 교도소에 수용중인 범죄자들에 대한 심층면접을 통해 이루어 졌다. 65세 이상의 고령 수용자 중 총 전과 10범 또는 동종전과 7범 이상의 조건을 충족하는 수용자에게 동의 여부를 묻고, 이에 응한 경우 면접을 실시했다. 총 10명의 수용자가 면담에 참여했으며, 연구참여자 1인당 3회의 면접을 실시했다.

이씨가 처음 범죄에 손을 댄 것은 19세 전후로 추정된다. 고아원과 청소년보호소를 거친 그는 어느 정도 나이가 되자 시설을 떠나야 했다. 시설에서 나온 이씨는 같은 고아원 출신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시작하며,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시설에서 나왔지만 아무 연고가 없었다. 아는 사람도 없었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사막에 놓인 느낌이었다. 당시가 60년대였다. 고아원에서 같이 살던 동료끼리 모여 구두도 닦고 신문도 뭐 팔고 뭐 갖은 고생 다 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이기도 했고, 뭐가 안됐다. 배가 고팠고, 겨울이 되면 추웠다. 그렇게 되다 보니 시장에서 뭐 하나 훔쳐먹고, 시작이 그리 된 것이다. 처음 교도소는 68년도에 들어왔다. 나왔다(출소)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세월을 살았다”

좀 더 구체적인 진술에 따르면 이씨와 동료들은 소매치기 활동을 했다. 공동생활을 하기 위해 방을 얻어야 했고, 월세 등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버스를 타면 5~6명이 함께 탄다. 임무가 나눠져 있다. 이른바 기술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타고 안주머니를 뒤진다. 물건을 빼내면 이를 받아서 내리는 역할도 있다. 이런걸 자꾸 보게되고, 결국엔 스스로 하게 된다”

이씨는 이 같은 생활을 통해 범죄자들과 친분을 쌓았고, 오랜 시간 소매치기 생활을 통해 그 무리에서는 어느 정도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실제 그는 소매치기단의 우두머리로 지목돼 체포되기도 했다. 소매치기는 그에게 어느 정도 금전적 여유도 가져왔다.

하지만 그는 청소년기부터 지속되었던 공동생활을 중단하고 독자적인 생활을 하면서 세탁소 운영을 시도한다. 이씨는 소매치기 등으로 얻게 된 돈과 구두닦이를 해 모은 금액으로 세탁소를 여는 데에 사용했고, 그 이유로 결혼하고 싶은 여성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구두닦이를 함께 하며 만난 여성이었는데, 이씨는 “(구두닦이가) 당시 돈 벌이가 됐다. 예를들어 서울역, 여의도 63빌딩 앞에서 구두를 닦으면, 당시는 모두 중소기업 사장이었다. 자본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와 함께 하기에는 지저분한 일이었고, 힘든일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내 자본을 들여 세탁소를 운영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범죄를 중단하진 않았다. 되려 결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다른 절도를 저질러 수감된다. 이후 세탁소는 파산했고, 여성은 이씨를 떠났다.

“여자를 위한다고 생각한 것이 화근이 됐다. 욕심을 부린 것이다. 물론 여자도 알았다면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이걸 속이고 ‘너한테 베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약점이 많아서다. 부모 형제도 없고, 멀쩡한 사람 수두룩한데 누가 나 같은 사람을 남편, 사위로 맞이하고 싶겠나. 서로 좋아했고, 책임감도 들고 하다 보니 일을 저지르게 됐다”

출소 후에는 다시 소매치기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수감으로 이어졌고, 이씨는 2년간 복역 후 80년에 출소한다. 출소 후 그는 새로운 여성과 결혼한다.

이 여성을 만난 후 약 5년간은 드러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결혼생활을 유지하면 서 딸이 출생했고, 과일유통업, 의류유통업 등을 통해 생활을 유지했다.

“정확히 81년 10월 1일에 이 여인을 만났다. 여인의 부모는 나에 대해 조금 알았다. 무조건 반대했다. 많은 노력을 했다. 겨우 허락을 얻어 용인에 조그만 방 하나를 얻어 함께 생활했다. 83년 5월 6일 첫 딸을 안았다. 이후 동대문에서 의류가게도 하고 장사도 하고 했다. 이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다. 더 시간적으로 보면 매일 온 행복은 아니고 살짝 지난간 것이지만”

하지만 유혹은 다시 찾아왔다. 과거 소매치기로 활동하던 당시 후배가 찾아오면서부터였다. 후배는 이씨에게 “뒤를 봐달라”고 밝혔고, 그는 여기에 응한다. 이후 이씨는 5년에 걸처 5회의 절도 및 장물 전과가 있었는데, 수감기간을 고려하면 거의 출소하자마자 체포되는 생활을 반복한 것으로 보인다.

상당수의 절도 전과 이후 장물취득과 경제범죄로 범죄 유형이 잠시 변화한다. 이 범죄와 관련해 그는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예전에 알고 지내던 이들을 돕기 위해한 행동이었는데,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배신해 체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씨는 50세 전후에 마약 유통에도 손을 된다.

“창피한 이야기다. IMF 이후에는 부도가 났다.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또 범죄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나무라는 게 뿌리가 단단하지 못하니까 내가 이렇게 되는구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복역 이후 마약을 시작하게 됐다. 교도소에서 알고 밖에서 알던 사람의 소개였다”

이후 그는 다시 체포돼 수감생활을 이어갔으며, 현재는 출소한 상태다. 그는 과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이 기회를 빠른 시간에 다른 사람보다 습득을 한 것이다. 고아원에서 주는 밥만 먹다가 나가라고 하니까 나가서 4, 5년 만에 터득한 것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 아 세상이 이렇구나. 범죄도 빨리 배웠다. 그러다 보니 돈은 잘 벌었다. 지금 돈 150만원도 작은게 아니다. 근데 당시 200만원씩 벌었다. 그것을 다 어찌 썼나 싶다. 장사를 할 때 보면 나는 서비스 방식이 좋았다. (자본금 등을) 쉽게 벌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에이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내는 내가 도망 다녔을 당시 빚을 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작과 멈춤

이씨를 비롯해 박 연구위원이 인터뷰한 10명이 고령까지 범죄를 이어간 이유를 간단히 설명할 수 없다.

박 연구위원 역시 “범죄 경력에 관한 한국적인 맥락에 대한 관심이 매우 부족했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면서 “이 연구는 매우 제한적이라 할 수 있는데, 범죄 경력이 있다가 중단하여 재진입하지 않은 분들은 접촉할 방법이 없었다는 한계, 그리고 면접에 응하지 않은 분들의 특성도 있을 것인데 그분들을 만나지 못했다. 특히 이 연구에서는 재산범죄 경력을 가진 분들이 많았고, 이러한 특성이 연구의 편이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결과를 해석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관련기사 : 사회적 유대감, 범죄를 멈추다

하지만 박 연구위원은 범죄의 시작은 비교적 명확하게 주장한다. 그는 “사례들 중에는 어린시절부터 가난했거나, 성장과정에 경제적 어려움 을 겪은 경우가 거의 부분이었고, 이러한 상황이 범죄를 시작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던 것은 틀림없다”고 지적했다. 앞선 예의 이씨 역시 ‘굶주림’으로 절도를 시작했고, 그를 제외한 나머지 9명 중 5명의 참여자 역시 경제적 어려움으로 범죄에 발을 내딛었다.

연구 참여자 김순임(가명)씨는 “어린시절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성매매 집결지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면서 “하지만 배고픈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돈을 훔친 것이 범죄경력의 시작”이라고 밝혔다.

이명선(가명)씨 역시 연구 인터뷰를 통해 “어머니가 재혼한 이후 양아버지가 용돈을 주지 않아 두부공장에 취업했다. 그런데 급여를 받지 못했다”면서 “그래서 두부공장 내 두부를 실어서 잔치집에 팔았다. 그게 처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모두 이성준씨와 같이 범죄의 멈춤은 존재한다. 박 연구위원은 “범죄를 중단한 경험이 있는 사례들에서 나타나는 거의 공통된 중단요인은 ‘결혼(과 출산)’, 그리고 ‘정규적인 노동에의 참여’”라면서 “이들은 결혼을 통한 안정 또는 가족에 한 책임감으로 잠시나마 범죄를 중단할 수 있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범죄가 아닌 경제활동과 노동 참여를 통해 범죄를 중단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성준씨 역시 결혼과 출산으로 이어진 5년간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이명선씨 역시 결혼 직후 범죄를 멈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때 번데기 장사를 했다. 다른 사람들이 한말을 팔 때 세배는 넘게 팔았다. 돈을 많이 벌었다. 그때 내가 20살이었고, 여자가 17살이었다. 여자는 늦게까지 혼자 있으니 빨리 들어와라 이야기 하고, 나는 먹고 살겠다고 발버둥 쳤다. 싸우기도 했고, 싸우면 백화점에서 옷도 사주고 했다”

정규적인 노동참여 역시 범죄를 중단하는 요인이었다. 인터뷰 참여자 김성민(가명)씨는 ‘젊은 시절 식당에서 일했던 시기를 매우 보람있었다’면서 ‘당시에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고 회상한다.

김순임씨 역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면서 범죄에 한 욕구도 없었으며,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이 즐거웠다고 밝혔다.

그는 “오래 다녔다. 일도 잘했다. 나는 부지런했다. 일이 끝난 뒤에는 구로시장에 가서 막걸리 한잔 하고 기분 좋으면 노래방도 한번씩 가곤 했다”면서 “당시에는 다른 생각 할 시간이 없었다. 일을 하고 피곤하니까 다른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박 연구위원은 이와 관련해 “범죄 경력자들이 사회적 유대를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교정기관에 수용되어 있는 동안 가족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프로그램 을 적극 시행하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경력범죄자들이 범죄를 중단할 수 있는 요인은 가족을 형성하여 사회적인 유대를 유지하는 것”이라면서 “그러나 많은 경우 교도소 수감 전후로 가족 관계가 깨어져 범죄를 중단할 사회적 유가 사라지기 때문에 범죄를 중단할 기회가 감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교도소 프로그램에 가족 회복 프로그램을 적극 적으로 모색하여, 수감중에도 가족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고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박 연구위원은 “범죄자들이 범죄 경력을 지속하지 않게 하기 위해 교정기관 출소자들이 합법적인 경제활동을 하며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면서 “경력범죄자들이 범죄를 시작하거나, 재시작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경제적인 곤란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범죄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들에게 합법적인 경제활동을 지원함으로써 범죄를 중단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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