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더듬이 소년에서 미국 대통령까지 44년간 정치 몸담아

두번의 비극적 사건 겪으며, 개인적으로 성장한 조 바이든

세번의 낙선 끝에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 트럼프 꺾고 대통령

[뉴스엔뷰]  도널드 트럼프의 재선을 꺾으며, 미국 46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조 바이든 당선인은 민주당의 대표적 정치인이다. 그는 지난 1976년부터 2009년까지 36년간 상원의원을 지냈으며, 그 이후에는 8년간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부통령 및 상원의장을 겸임했다. 미 국민들은 오랜 시간 정치를 해온 그가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이어 갈 수 있다는 기대를 갖는다.

도널드 트럼프의 재선을 꺾으며, 미국 46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조 바이든 당선인은 민주당의 대표적 정치인이다. 그는 지난 1976년부터 2009년까지 36년간 상원의원을 지냈으며, 그 이후에는 8년간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부통령 및 상원의장을 겸임했다. 사진/ 뉴시스 제공
도널드 트럼프의 재선을 꺾으며, 미국 46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조 바이든 당선인은 민주당의 대표적 정치인이다. 그는 지난 1976년부터 2009년까지 36년간 상원의원을 지냈으며, 그 이후에는 8년간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부통령 및 상원의장을 겸임했다. 사진/ 뉴시스 제공

조 바이든은 오랜 정치기간동안 화려한 활동을 이어왔다. 그는 펜실베니아주의 탄광도시인 스크랜턴에서 델라웨어주로 이주한 10세에 마틴루터 킹, 존 F 케네디 등에 영향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존 바이든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그들의 연설과 신념, 그들이 제시한 꿈에 휩쓸렸다”면서 “델라웨어 대학에서 정치학과 역사학을 공부하게 된 것 역시 그들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나는 어린시절 말을 더듬어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곤 했다”면서 “멋진 위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받았고 콤플렉스를 극복해 성장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대학 졸업 후 시라큐스대학에 진학해 법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국선 변호사로 일한 존 바이든은 1970년 27세 나이에 뉴캐슬 의회 의원에 출마, 당선된다. 2년 뒤 1972년엔 델라웨어에서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한다. 당시 민주당이 약세였던 이 지역에 바이든은 고심 끝에 출마, 재선의 현역 의원을 꺾으며, 미국 역사상 다섯 번째 최연소 상원의원으로 워싱턴 중앙 무대에 진출했다. 하지만 “승리는 비극으로 변”하고 만다. 선거에서 이긴지 몇 주 지나지 않아 가족들이 교통사로를 당해 부인과 어린 딸이 숨졌고, 두 아들도 크게 다쳤다. 바이든은 상원의원 자리를 포기하려했지만 주변의 만류로 아들의 병실에서 취임선서를 하고 의원활동을 시작했다.

두 아들의 병간호 때문에 바이든은 워싱턴DC 의회 의사당에 매일 기차로 출퇴근 했다. 두 아들의 아침 식사와 저녁 잠자리를 위해서도 그는 5년 내내 윌밍턴과 워싱턴DC를 잇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당시 30년간 장거리 출퇴근을 하면서 기차 직원들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직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미국의 언론들은 “소탈한 인물”, “다정다감한 성격”, “권위의식이 없다”는 호평을 쏟아내기도 했다. 1977년 바이든은 두 아들의 지원으로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일하던 질 제이콥스와 결혼한다.

바이든은 의정 활동 기간에 여성폭력방지법과 기후변화 대처 법률 제정을 주도했으며 테러리즘과 대량살상무기 대응 등과 관련한 입법에도 힘을 쏟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권, 환경, 소비자 보호, 고령자 돌봄, 건강보험 같은 생활밀착형 이슈에 관심을 갖고 연방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다. 1987년부터는 8년간 상원 사법위원회 위원장을 연임했고, 2000년대 들어서도 두 차례나 외교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존 바이든은 지난 198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지만, 연설문 표절 의혹으로 낙마했고, 2008년 다시 당내 경선에 나섰지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밀려 중도 포기했다. 하지만 중도 성향의 백인 표를 끌어들이기 위해 버락 오바마는 조 바이든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 그는 이를 수락했다. 결국 오바마의 승리와 함께 부통령이 되었다. 2012년에도 재선에 성공한 버락 오바마가 바이든을 다시 부통령에 임명하면서, 둘의 파트너십은 계속된다.

재선 이후 바이든에게는 또 다른 비극이 찾아온다. 첫째 아들 보 바이든이 어린 시절 교통사고 후유증을 극복하고, 법조인이 됐지만 2015년 뇌종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들의 사망으로 다음해 있던 미국 대선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둘째 아들 헌터 바이든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코카인을 복용한 전력과 우크라이나 가스 회사 관련 스캔들 등 논란의 중심에 있기도 했다.

그리고 조 바이든은 2019년 세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다. 이번 대선 경선 과정은 쉽지 않은 길의 연속이었다. 바이든은 ‘대세론’을 바탕으로 경선에 나섰지만 초반 아이오와 코커스와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연패했다. 하지만 백인 중심 지역을 벗어나 흑인과 라틴 등 다양한 계층이 포함된 전국 각지 경선이 진행되면서 승기를 잡기 시작해 대역전극을 펼치며, 3수 끝 민주당 대선 후보직에 오르게 된다.

이후 트럼프와의 선거에서 승리하며 조 바이든은 미국의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됐다. 현재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대선 불복 선언을 하면서 미국이 양분돼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지만, 미 언론과 선거 전문가들은 “바이든이 통합을 이뤄낼 것”이라고 예상한다.

오마바 전 대통령 역시 “불리함을 극복한 스크랜턴 출신의 스크래피한(scrappy, 허접한) 소년”이라고 그를 칭하며, 현 상황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응원했다. 그는 대선 승리 가능성이 높아지자 지난 4일 “대통령은 당파적인 자리가 아니다. 나를 선택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서도 일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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