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황병규 춘천갱생보호소 후원연합회 이사

[뉴스엔뷰] 감옥에서 출소한 후, 갱생을 해 사회진출을 바라는 출소자들이 사회에 나와 전과자라는 이유로 눈총을 받는다. 그러니 당연히 의기소침해진다. 감옥에서 출소했지만 오갈 때 없는 수감자들이 사회진출을 위해 머문 곳이 갱생보호소이다.

법무부 보호공간인 춘천갱생보호소에서 몇 십 년째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황병규(61) 씨의 일화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현재 ㈜씨씨아이에이치에스 이사인 황씨는 강원도 춘천갱생보호소 후원연합회 이사를 맡아 갱생보호소 봉사활동에 열중하고 있다.

그는 지난 1975년 10대 때 서클(조직)을 만들어 서울 청량리에서 패싸움을 했다. 이로 인해 그해 첫 소년원에 입감됐다. 다섯 번의 소년원 입감을 포함해 총 17년간의 옥살이를 했다.

황씨는 감옥에서 출소한 후 페인트칠, 칼국수집, 산 간벌작업과 벌목작업, 구두 닦기, 꽃집 등 해보지 않는 막일이 없을 정도였다.

마지막 2004년 출소이후, 갱생을 해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주변의 시선은 아직까지 싸늘하다는 것이다.

현재 춘천갱생보호소 후원연합회 이사인 황병규 씨를 지난 2일 강원도 춘천 소양스카이워크 주변 한 카페에서 소설가 이외수 작가와 함께 만났다.

황병규 이사
황병규 이사

먼저 그는 갱생보호소와 이곳 봉사활동에 대해 나름대로 설명했다.

“벌써 몇 십 년째 법무부 보호공간인 춘천갱생보호소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제가 경험했던 감옥에서 나와 갱생을 하려는 출소자들을 돕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법의 날’에 여러 언론에서 나를 조명하기도 했다. 교도소 출소자들 중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 이들이 갱생을 하기 위해 보호소에 기거한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심하다. 주변에서 빵재비, 깡패, 건달 등으로 말하니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갱생을 해 사회진출을 할 수가 없다. 내가 2년 전 서울여성회관에 가 강의를 할 때도 전과자라는 이유로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지 못할망정 편견을 가지면 일어나지 못한다고 강조를 했다. 춘천에서 과거에 건달 ‘망구’라고 하면 나를 다 안다. 사회에 나와 내가 손이 부러지도록 일을 해도 나를 보고 일부 공무원들도 ‘저에는 깡패야 건달이야’ 그런 편견이 아직도 있는 것 같다. 내가 가끔 신문에 보도돼 친구들이 좋은 일한다고 전화가 올 때 힘이 쏟는다. 나의 봉사활동을 알아주라는 것보다, 모든 국민들이 출소자(전과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버렸으면 한다.”

황씨는 2004년 마지막 출소 이후 다시는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무척 노력을 했다고도 했다,

“감옥에서 나와 칼국수 집에서 일했고 페인트칠도 했다. 산에서 간벌작업과 벌목도 작업도 했다. 막일이라면 거의 해보지 않는 일이 없을 정도이다. 이후 열심히 살면서 결혼을 했고 아들과 딸을 다 출가시켰다. 속된 말이지만 마지막 출소할 때 몸무게가 120kg이었다. 그때 입던 죄수복을 가지고 와 2년간 침실문 앞에 걸어놓고 자면서 보고 일어나면서 봤다. 감방 생활을 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 옷이 아직도 집에 보관돼 있다. 교도소는 절대 가지 않는다는 다짐이었다.”

그는 교도소에서 컴퓨터로 꽃 리본을 출력하는 것을 배워, 출소 후 꽃집을 운영했던 일화도 소개했다.

“5년을 선고받고 교도소 10여 곳을 이감을 갔다. 청송2교도소에 있을 때 컴퓨터를 배웠다. 지금은 컴퓨터로 꽃 리본을 프린트하는 것이 상식이 됐지만, 그 당시는 알려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감옥에서 배웠고 사회에 나가 꽃집을 해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출소하자마자 꽃집을 했는데, 정말 잘됐다. 꽃에 꽃 자도 모른 사람이 꽃 일을 하면서 정말 노력했다. 서울에서 전문가를 데려다 장래식장 영정재단장하는 것을 1년 간 배웠다. 손이 다 갈라질 정도로 일을 했다. 춘천에서 꽃을 최고로 잘 단장한 사람으로 소문났다. 당시 춘천에도 상조회사가 많이 생겼는데, 그 회사에서 제가 만든 꽃단장을 좋아해 자주 불렀다.”

이어 정말 장사가 잘된 꽃집을 5년 만에 그만둔 가슴 아픈 사연도 얘기했다.

“잘된 꽃집을 5년 만에 때려 치웠다. 건달들이 나타나 장사가 잘 된 것을 두고 뺏으려고 했다. 박수를 쳐줘야 하는데 그것을 뺏으려고 했다. 얘기를 하다가 격분해 칼로 사고를 쳤다. 과거 마흔 살에 감옥에 들어가 5년 만인 마흔여섯 살에 출소했다. 지금 들어가면 육십이 넘어 출소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 특수대 조사를 받고 검찰로 넘어 갔다. 검사님 앞에서가 내가 교도소에서 5년을 살고 나와 먹고사는데, 내 밥그릇을 빼먹으려고 하는데 내가 가만히 있겠냐고 그랬다. 정말 억울하다고 했다. 그래서 공소기각이 돼 풀려났다. 결국 나에게 꽃집을 가져간 그들도 이후 감옥에 갔다.”

황씨는 자연스레 춘천 갱생보호소 자원봉사 얘기를 꺼냈다.

“법무부갱생보호공단 춘천지부(갱생보호소)를 자주 찾아가 그들에게 상담과 후원금 그리고 물품 등을 전달하고 소통을 하고 온다. 갱생보호소에 가면 20~30명 정도 거주한다. 특히 명절 때 20박스 정도 사과를 가지고 가 함께 나눠 먹고 후원금도 주고 상담도 해준다. 현재도 갱생보호원을 저희 집처럼 다니고 있다. 법무부 갱생보호소와의 인연은 열아홉 살 때였다. 소년원을 다섯 번 갔다 왔기 때문이다. 당시 김영태 갱생보호소 직원(지부장)이 자전거를 타고 저희 집까지와 교화시키려고 했다. 젊었으니 그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이를 먹다보니 차츰 그 분이 훌륭하게 느껴졌다. 당시 법무부갱생보호공단 갱생보호소에서는 거주한 사람들에게 자립심을 길러주려고 리어커도 사주고 그랬다. 당시 리어커가 비쌌다. 물론 저도 그런 도움을 받았고, 후원금도 받았다.”

이어 몇 십 년 갱생보호소 봉사활동을 하면서 느낀 안타까운 일과 보람도 얘기했다.

“갱생보호소에 있다, 얼마 전 밖에 나와 돌아가신 분이 있다. 내가 갱생보호소에서 많이 도운 분이다. 갱생보호소에서 나와 결국 나보다 두 살 많은데 돌아가시는 것을 보니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느꼈다. 갱생보호소에서는 자립할 때까지 도와준다. 지금은 과거와 달리 개인 독방을 사용한다. 스물여섯 살 먹은 청년이 출소해 갱생보호소에 1년을 거주하며 근로자 아파트 공사장에 가 막일을 해 천만 원을 모았다. 이런 아이들을 보면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 갱생보호소에서는 숙식제공이 다 되니 버는 것을 모을 수 있다. 갱생보호소에 거주하면서 일자리를 찾아 나간다. 제가 일한 곳의 공식 명칭은 한국법무갱생보호공단 춘천지부이다.”

이날 그는 소설가 이외수 작가와의 오랜 인연도 강조했다.

“형님(이외수 작가)을 어린 십대 때부터 좋아했다. 과거 명절 때 할아버지께는 인사를 가지 않아도 형님께 꼭 인사를 드렸다. 마지막 감옥은 1999년에 입감해 2004에 출소했다. 당시 살인으로 구속이 돼, 한 변호사의 도움으로 상해치사로 바뀌어 15년형을 받았다. 이후 최종선고는 5년을 받았다. 형님의 역할이 컸다. 15년 선고를 받았을 때, 형님이 면회를 와 변호사를 사지 말라고 했다. 형님이 법원에 진정서를 간곡하게 써 제출했다. 지인, 주변인 등 1000명 정도 많은 사람들의 서명을 받았다. 형님의 노력으로 5년 형이 확정됐다. 그래서 형님과 뗄 수 없는 인연이다.”

그는 지난해 7월,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가 인수한 춘천 고슴도치섬(구 위도)에서 제3의 인생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지금 월급쟁이지만 회사가 인수한 춘천 고슴도치섬 사업 허가가 나오면, 제3의 인생을 그곳에서 일을 하며 살고 싶다. 과거 세계적 축제인 춘천 마임축제가 10여 년간 열린 곳인데, 지금은 울창한 숲도 없어지고 폐허가 됐다. 시에서 재인허가 문제가 걸려있지만,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감옥살이를 했다고 낙인을 찍지 말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재차 전했다.

“사람들이 좋지 않은 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항상 갱생하고 싶은 욕구가 있으니, 가급적이면 거기에 힘을 불어 넣어주고 그 의지를 꺽은 일을 삼가 했으면 한다. 의지를 겪은 것보다는 계속적으로 용기를 주고 정말 밝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함께 일조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한다. 과거 왕성했던 정의감과 의협심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해, 그것을 긍정적이고 더 좋은 일에 쓸 수 있도록 도움을 줬으면 한다.”

이날 함께한 소설가 이외수 작가는 황병규 씨의 선행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는 뜻을 피력했다.

“관청에서는 이 친구의 존재 자체도,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는 사실도 전혀 모른다. 사회적으로도 청소년 돕기라든지, 불우이웃돕기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 자랑할 친구도 아니다. 그가 선행과 사회적 덕망을 쌓아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감옥에서 출소한 2004년 이전 과거를 깨끗이 지운지 오래됐다. 전과자라는 사회적 인식들이 많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뉴스엔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