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동아시아 백년 역사 담은 서사적 환타지 소설

[뉴스엔뷰]

박범신 작가.

올해 문단 데뷔 44년을 맞은 박범신 작가가 장편소설 『유리―어느 아나키스트의 맨발에 관한 전설』을 24일 출간했다. 『유리』는 박 작가의 43번째 소설이다. 


『유리』는 20세기 초 아버지를 죽이고 유랑자의 운명으로 동아시아 가상 국가를 떠도는 아니키스트인 주인공 유리의 백년에 걸친 맨발의 일대기를 담은 서사 판타지 소설이다.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등이 가상국가로 등장하며 동아시아 근대 백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서사적 이야기로 녹아있다. 

판타지 기법을 도입한 『유리』는 구렁이, 은여우, 원숭이, 햄스터 등 의인화된 동물들이 나와 주인공 유리의 여정에 함께 한다. 박범신 작가는 소설에 대해서 "'유리'는 지금까지의 내 소설에 비해 스케일이 무지 크고 아주 재미있다"고 말한다. 

소설 『유리』는 종이책 출간에 앞서 2016년 3월부터 7월까지 카카오페이지에서 ‘웹소설’형식으로 연재된 바 있다. 당시 9만 명이 넘는 구독자가 이 소설을 구독했다. 그후 작가는 소설 『유리』의 완성도를 제고하기 위해서 각 장면의 연결부를 손봤다. 소설 후반부에 일제 강점기 위안부의 이야기와 격랑에 가득찬 한국 현대사의 주요 길목을 보강하는 작업을 올 여름 진행했다. 이렇게 해서 소설 『유리』는 원고지 500여 매 분량이 늘어난 총 588쪽의 장편소설로 새롭게 태어났다. 

소설 『유리』는 동아시아 근대사 백년의 과정이 응축되어 있다. 유리는 1915년, 화인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수로국에서 태어난다. 일곱 살에 천자문을 떼고 동물들과도 말이 통하고, 화인국의 글자도 읽고 쓸 정도로 영특한 아이다. 

그러나 가난한 아버지가 어느날 갑작스레 죽자 유리의 운명은 뒤바뀐다. 큰아버지는 쌀가마니를 들고 와 어머니의 방에 자주 드나들기 시작한다. 큰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정한 장면을 목격한 뒤로 유리의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게 된다. 살길을 도모해주겠다는 큰아버지의 제안에 따라 어머니는 유리를 큰집의 양자로 맡긴다. 큰아버지는 수로국 인신매매 조직의 수장으로 화인국의 착취와 수탈에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유리는 붉은 댕기를 한 소녀의 뒤를 따라가다 발견한 동굴 속 비밀의 샘에서 훗날 자신의 죽음을 미리 보고 강한 느낌을 받는다. 아버지가 진행하던 위안부 차출 사업에 속아 붉은댕기가 떠나자, 유리는 더는 아버지의 죄를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아버지의 죄를 벌하고자, 아버지가 애용하던 러시아제 볼트액션 소총으로 그를 쏘고 고향을 떠난다. 

이때부터 유리의 유랑민의 삶이 시작된다. 근현대 역사의 부침 속에서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었던 아나키스트의 삶을 산 유리에 대해서 박범신 작가는 "『유리』는 은닉돼 있던 내 꿈의 사실적인 변용”이라고 고백한다. 

박범신 장편소설 '유리' 표지.

1915년에 태어나 2015년에 죽음을 맞이하는 주인공 유리의 백 년 인생은 박범신 작가가 ‘짐승의 시대’로 명명한 동아시아의 근대 백 년 역사의 축약판이다. 『유리』는 전쟁의 도가니로 치달은 20세기 초 국제정세와 비극의 한국 전쟁과 분단, 사회주의 중국 건설과 대만의 정치 사회적 격동, 산업화와 독재의 한국 현대사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소설『유리』를 출간한 박 작가는 "유리처럼 나 역시 일찍이 나의 ‘주검’을 여실히 본 적이 있는바, 이 외 다른 길을 상상한 적은 한번도 없다"며 "당연히 나는 어제-오늘-내일도 이야기하는 바람으로 살기를 바란다"고 희망한다. 

유리를 구상하고, 쓰고, 탈고하는 동안 박범신 작가는 여지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웅대한 역사의 터널을 지나 왔다. 박근혜 전 대통령-최순실의 국정농단 사건과 촛불시민혁명에 이은 문재인 정부의 출범이 그것이다. 통탄을 금치 못하는 2014년 4월 16일 비극적인 세월호 참사 사건, 그 이후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동료 문인들과 함께 촉구했던 박범신 작가는 '블랙리스트 작가'로 분홍색 낙인이 찍혔다. 지난해 여름 문재인 대통령(당시 민주당 전 대표)과의 부탄 트래킹에 동행했던 박 작가는 이후 극우 인터넷 커뮤니티 회원들과 보수 언론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당하기도 했다. 

그 지난한 시간, 박 작가는 "매일 상승하고 매일 추락하는 일. 끔찍한 생성 황홀한 멸망의 나날"을 겪으면서 "유리에게 ‘맨발’이 있듯이 내겐 오래 제련해온 '나의 문장'"으로 버텨왔음을 토로했다.      

웅대한 서사적 환타지 소설 『유리』는 박범신 작가의 후반기 대표 소설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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