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엔뷰] 혹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가 1651년에 출간한 「리비이어던(Leviathan)」에서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을 표현한 정치 용어입니다. 시간으로 따지면 지금으로부터 무려 460여 년 전이지만, 마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사진:뉴시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사교육 시장으로 내몰려 장난감과 놀이기구보다는 영어책과 수학공식과 더 친해져야 하는 우리의 아이들, 그리고 자신의 아이들이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천문학적 사교육비를 충당하기 위해 영혼을 팔아서라도 돈을 벌겠다고 덤벼드는 우리의 부모들, 그리고 경쟁사회의 최전선에 서있는 부모를 대신하여 노후도 포기하고 아이를 돌봐야 하는 어르신들...

살고 있는 곳이 강남이건, 강북이건, 신도시이건, 모두가 불행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2016년의 대한민국입니다. 그렇게 모두가 오로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동안 우리 사회는 더욱 더 위험하고, 불안하고, 평화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약육강식의 도시 정글로 변해버렸습니다.

그 실상을 온 국민이 확인한 것이 세월호 참사, 윤일병 구타사망 사건, 그리고 대한민국을 총체적 혼란으로 빠트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죠. 모두가 자신만의 욕심과 생존을 위해 올인하면 할수록 우리의 아이들은 더더욱 위험천만하고 불안한 조건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계속되는 악순환이죠.

세월호가 침몰하기 직전의 상황에서 무책임한 어른들에 맞서며 동료 학생들을 위기로부터 구하는 리더십을 가진 학생이 1~2명이라도 있었다면... 윤일병이 가혹한 구타를 당할 때에 온 몸을 던져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외치고 제동을 거는 선임병이 1~2명이라도 있었다면...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전횡, 그리고 정유라의 편법과 부정에 대해 단호하게 'No'라고 말하는 정치인, 공직자, 교수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꿈같은 상상을 해본 사람이 어디 저뿐이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공부하고, 위험하거나 귀찮은 일에는 신경 쓰지 말라고 부모와 어른들로부터 배운 사람들에게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입니다.

1960~70년대의 고도성장과 1980~90년대의 민주화와 세계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그야말로 격변의 시대를 보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차츰 빈부 격차도 생기기 시작했고, 새로운 상류층이 탄생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부동산 재벌, 학교 재벌, 유통 재벌, 벤처 재벌, 금융 재벌, 엔터테인먼트 재벌 등으로 기득권층이 분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의 모습이 대단히 초라해 보이기 시작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내 아이만큼은 상류층은 못되더라도 중상류 정도로는 만들어야겠다며 너도 나도 사교육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결과 살인적인 고학력과 고스펙 인플레이션이 나타났죠.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우리가 바로 국가이고 사회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마치 국가와 사회가 나와는 전혀 별개의 마치 주어진 영구불변의 것인 양 행동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국회의원이건 경찰서장이건 세무서장이건 사단장이건 학교 이사장이건 모두 자신의 자리를 망각한 채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치인, 기업인, 지식인의 부패와 사법처리 뉴스는 이어졌고, 그것은 대한민국 모든 영역의 권위와 신뢰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교육 열풍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서울대를 나와도, MBA 과정을 마쳐도, 자격증을 따도, 고시에 합격해도, 그 어떤 것도 우리 자녀의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하지만 여전히 우리들은 자신이 겨냥하고 있는 그 길이 마치 성공의 보증수표이고 마스터키인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부모와 어른들로부터 공부만 열심히 하면 모든 것이 보장된다는 것을 주입받은 우리 아이들은 대학 입학 후 우리 사회의 현실을 경험하면서 참담함 속에 한 두 명씩 멘붕 상태로 빠져들게 됩니다. 단지 그것을 좀 더 일찍 깨닫느냐 늦게 깨닫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절망하게 되죠.

이렇게 해서는 영원히 답이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에 대한 관심을 끊고 오직 내 아이가 어떻게 경쟁에서 승리할 것이냐에 모두가 함몰되는 것을 이제라도 멈추지 않으면, 결국 우리 아이들이 서로가 서로를 향해 총칼을 겨누며 소수만이 살아남고 나머지 모두가 죽거나 추락하는 정말 상상하고 싶지 않은 세상이 오게 됩니다.

특히, 70~80년대 고도성장과 민주화의 혜택만 받았을 뿐, 도덕성과 시민의식을 팽개치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부추긴 386세대가 각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라도 스스로가 국가와 사회의 중요 구성원이라는 정체성을 회복하여 시민정신과 도덕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 아이들에게 '묻지마 성공'과 '잔혹한 경쟁'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건전한 공동체를 위한 사회 구성원 간 협력과 신뢰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경쟁에서 뒤쳐진 아이들을 무시하고 천대하기보다는 포용하고 헌신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경쟁에서 승리하면 당장은 뿌듯하고 달콤할지 모르지만 패배한 누군가가 자신 혹은 자신의 자녀를 통해 또다시 복수혈전을 꿈꾸는 상황이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편법과 요령을 통한 승리보다는 신의와 원칙 속에서의 패배가 더 가치 있게 평가받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거짓과 모략 속에서의 성공보다는 진실과 배려 속에서의 패배가 더 가치 있게 평가받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계속해서 미국 민초들의 도덕성과 시민정신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도, 그것이야말로 수 백 년의 역사와 경험 속에서 형성되어 온 선진국으로서의 품격이자 자부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거죠.

보수주의의 핵심은 스스로에 대한 혁신과 화합을 위한 관용입니다. 마찬가지로 진보주의의 핵심은 기회균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보수주의는 기득권에 대한 집착과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낙인찍기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진보주의 또한 패거리 문화와 기득권 안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가짜 보수와 가짜 진보가 정치권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마지막 보루는 결국 양심과 열정을 가진 시민세력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과 방향을 분명히 할 때에 비로소 정치권도 긴장하고 스스로를 돌아볼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주권자인 국민을 배신한 것에 대해 응당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여당을 심판하는 주도권을 쥐고 있지만 야당도 그동안의 무기력함과 무책임함에 대해 국민에게 참회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우리 시민들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본연의 자리를 잃어버린 채 정치권을 탓하고 언론을 탓하고 기득권층을 아무리 탓해봐야 그들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 자녀들의 안전, 행복, 미래는 우리들 스스로가 열어나가야 합니다. 시민으로서의 투철한 비판의식, 격조 높은 참여의식, 우리 사회를 향한 희망과 열정이 있을 때에 비로소 대한민국은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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