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인정한 ‘따뜻한 카리스마’의 소유자

▲ 자랑스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최초의 대한민국 출신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유엔(UN, United Nations)을 대표하는 ‘지구촌 대통령’인만큼 강한 카리스마가 필요한 자리다.

사무총장이 되면 우선 낯선 세력을 경계하는 유엔 관료들에게 둘러싸인다. 일을 잘 못하면 전 세계의 비난을 받는 것도 감수해야만 한다.

취임 초반만 하더라도 선진국의 언론들은 반기문 총장이 제 역할을 못한다며 깎아내리는 기사를 쏟아냈고, 그가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 출신이라는 점을 대놓고 무시하기도 했다. 그들은 반기문 총장에게 카리스마가 부족해 보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37년을 외교관으로 생활한 반기문 총장은 사실 외교관으로서의 능력보다는 사람에 대한 믿음과 열정이 돋보이는, ‘따뜻한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작은 인연도 소중히 하고, 상대가 누구든 친절하게 배려하는 자세가 몸에 배어있었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유세를 떨지도 않았고 자신을 낮출 줄 알았다.

덕분에 반기문 총장의 외교정책에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은 있어도, 그를 인간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무총장이 되고 나서 반기문은 유엔의 리더로서 일하기 좋은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동안의 관행이 무너지는 것이 싫었던 일부는 저항하기도 했다. 하지만 외교도 정치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아무리 대단한 리더라도 다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반기문 총장은 그들 모두를 인간적으로 대했다.

그의 믿음은 유엔에서도 통했다. 직원들은 차츰 그의 노력에 동참하기 시작했고, 결국 반기문 총장은 유엔을 개혁할 수 있었다.

반기문 총장은 국제 문제가 생기면 요란을 떨거나 말부터 앞서는 지도자들과 달리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문제를 해결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반기문 총장의 따뜻한 카리스마는 세계 리더들의 믿음을 얻었다. 그리고 5년의 임기가 끝난 2011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192개 회원국의 만장일치로 그 자리를 지키게 됐다.
경쟁자도, 표결도 없었다. 유엔 사무총장이 거의 모든 회원국의 지지를 받는 분위기는 국제적 다툼이 오가는 유엔에서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 반기문 사무총장 고향인 음성군 방문때 연호하는 군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있다.
8대 유엔사무총장직 수락 연설에서 반기문 사무총장은 “겸손은 결코 헌신이나 통솔력의 부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겸손은 요란한 팡파르를 울리지 않고 과업을 완수하는 조용한 결단력입니다”고 말한 바 있다.

반기문의 ‘글로벌 리더쉽’은 평소의 겸손과 배려, 그러나 소신과 도전 같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성품을 잘 나타내는 그의 어록 속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자기를 낮추는 지혜를 배워라”, “나를 비판하는 사람을 친구로 만들어라”며, 부드럽고 친화적인 면을 보이는 한편 “자신부터 변화하라”, “당신의 생각이 옳다면 굽히지 마라”라는 강한 의지를 보이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자세는 오늘날 세계가 그를 신뢰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일하고 있는 UN은 1945년 10월에 설립되어 현재 192개 회원국 전 세계 대표들이 전쟁방지와 평화유지를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UN)로 모든 분야에서 국제협력을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는 국제기구이다. 활동은 크게 평화유지활동, 군비축소활동, 국제협력활동으로 나뉘며, 주요기구와 전문기구·보조기구로 구성되어 있다.

반기문 사무총장은 1961년 UN 3대 사무총장이었던 미얀마의 우탄트에 이어 두 번째 아시아인으로서 UN 사무총장에 오른 반 총장은 우리나라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UN사무총장은 외국방문 시 국가 원수 급 대우를 받고 24시간 그림자 경호와 별도 관저가 제공되며, 임기 5년에 연임할 수 있고 4만 명에 이르는 산하 기구 직원의 인사권과 약 1조 3천억 원의 예산집행권을 갖는다.

이처럼 막강한 권한과 세계적인 명예를 갖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반기문 사무총장은 충북 음성, 가난하지만 평범했던 가정에서 태어나 충주고 3학년(1962년) 적십자사 비스타(VISTA) 프로그램의 한국대표 4명에 뽑혀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부부 와 대화를 하는 중 케네디 대통령이 꿈이 뭐냐고 묻자 스스럼없이 외교관이 되겠다고 했다. 그 후 그는 목표를 외교관에 맞추게 되었다.

서울대 외교학과에 진학해, 졸업한 반기문은 1970년 제3회 외무고시에 차석으로 합격했지만 신입 외교관 연수를 마칠 때는 수석을 차지한 반기문은 그의 첫 부임지를 인도 뉴델리로 선택했다. 모든 외교관의 1지망이었던 워싱턴을 포기하고 뉴델리로 간 이유는 어머님께 집을 사드리고 싶은 이유였다고 한다. 위험지에 대한 특별수당을 모아 집을 사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선택이 반기문 인생항로의 결정적인 방향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당시 주 인도대사였던 노신영 전 국무총리를 만나게 되는데 노 전 국무총리는 반기문에게 전적인 신뢰를 보냈다고 한다.

그 후 노신영 국무총리의 발탁으로 인해 의전비서관에 오르게 된다. 그의 주요경력을 보면 인도대사관과 유엔 1등 서기관, 유엔과장, 주미대사관 참사관, 미주국장을 거친다. 김영삼 정부 시절 외교부 차관보, 청 와대 의전수석비서관, 외교·안보수석비서관에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외교통상부 차관을 거쳤으며, 노무현 정부에 들어서 외교통상부 장관 자리에 오르게 된다.

▲ 환영해준 음성군민들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는 반기문 사무총장
그의 그동안 행적 중 특기할 만한 업적을 보면 93~94년 제 1차 북한 핵위기 때 주미대사관 정무공사로 있으면서 한미 간 대북정책 조율 실무총책을 맡은 적이 있으며, 97년에 는 그 유명한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 망명 때 밀사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중국과 필리핀을 오가며 황장 엽 씨의 망명을 성사시킨 주역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경력과 업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반기문 차관은 2001년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 2001년 2월 한/러 정상회담 합의문에 실무진 실수로 탄도탄요격미사일 제한 조약의 '보존과 강화' 를 골자로 한 문장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부시 행정부가 강력하게 폐기를 주장했던 것으로서 이것 때문에 한국과 미국 간의 큰 파문이 일어 그 책임으로 반기문 차관은 외교통상부 차관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그에게 다시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 있었다. 반 사무총장이 '내 영원한 보스'라고 부르는 한승수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 겸 유엔총회 의장이었다. 그의 부름을 받아 2001년 유엔총회 의장비서실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반 사무총장은 당시 자신에게 있어 외교부의 마지막 보직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이때의 경험과 인맥이 오늘날 사무총장 당선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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