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엔뷰] 페미니즘을 검토하는 면에 있어서 뉴질랜드의 상황을 검토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이유가 있다. 한국과 동일하게 여성부가 최초로 만들어진 곳이고 ‘이전’의 뉴질랜드의 상황들을 ‘현실’의 국내 모습에서 지금 어느 정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주 같다고 할 순 없어도 뉴질랜드를 통해 한국 페미니즘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있을 수 있는 치명적인 악순환을 겪지 않는 대비를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뉴질랜드 남성들의 국경 탈출

실제로 그들이 국경을 탈출했다는 게 아니다. 단적으로 볼 때 이후 있었던 뉴질랜드의 극단적인 상황은 거의 ‘탈출’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에 비견될 수 있었다. 이미 결혼을 했었거나 혼외자로라도 자신의 월급의 80프로를 빼앗겨 본 경험이 있는 남성들은 이제 자신들이 정신을 차리고 가야 할 곳이 다른 곳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 이전에 그런 경험이 없는 천연 기념물 남성들도 자국 내에서 배우자를 찾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뉴질랜드 남성의 18%에 달하는 수가 해외에서 배우자를 찾는 기현상이 뉴질랜드에 일어나게 되었다. 생각해 보라. 전체 남성 다섯 명 중 한 명이 외국으로 떠나고 있다면 그것을 정상이라고 볼 사람이 있겠는가? 더욱이, 그렇게 외국을 찾는 사람들은 소위 뉴질랜드에서도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엘리트층이었다. 사회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핵심 계층이 빠져 나가는 것은 국가적으로 볼 때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었다. 아니, ‘바람직’을 떠나 매우 우려되는 상황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살폭탄테러식의 ‘임신공격’, 평생 수익의 80%를 빼앗기는 남성, 잘생기고 능력 있는 남성들의 해외 탈출... 이걸 어찌 정상 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관련 내용들이 2부에 기술되어 있다.) 뉴질랜드 엘리트층이 탈출한 나라는 주로 미국이었다. 사회 지도층의 잘생긴 능력자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살 곳을 찾아 떠났다. 하지만, 뉴질랜드의 고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뉴질랜드 여성들 사이에서 일반적이 된 비정상적 패턴

뉴질랜드 안에 남성들이 부족하다 보니, 여성들 사이에서 관광객들과의 짧은 만남과 섹스가 일상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이후, 여성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직업여성과 다를 것 없는 패턴으로 살아가는 일이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했다. 뉴질랜드 여성의 평균 섹스파트너 수는 20명이라고 한다. 이 수치가 주목할 만한 것인 이유는, 당연히 뉴질랜드가 이 면에서 1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2위인 국가를 거의 두 배 정도 따돌린 수치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패턴의 가정생활이 아니다 보니, 뉴질랜드 여성들 중 상당수가 미래에 대한 설계 보다는 다소 일그러진 형태의 임기응변식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편이 되었다. 결혼이라는 게 능력 있는 뉴질랜드 남성과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상황이 그렇질 못하다 보니 남자들이 떠난 자리에 관광객이나 자신을 추스르기에도 바쁜 열악한 환경의 자국 남성들과 그럭저럭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뉴질랜드의 현재는,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성 고학력자들이 백수 남성들에 그럭저럭 순응하며 살아가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이전의 ‘여성 주도권’ 상황과는 많이 다른 ‘역전된’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변화의 조짐이 근년에 생기다.

최근 4, 5년 전부터 뉴질랜드는 20대 여성이 20대 남성을 인연으로 만날 확률이 점점 희박하다고 한다. 결국 페미니즘을 부르짖던 세대는 지금의 4, 50대 여성들이었는데, 피해는 고스란히 이후 세대들인 2, 30대 여성들의 차지가 되었다. 현재 뉴질랜드의 신세대 여성들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다. 이전 세대 여성들의 페미니즘이 불러 온 재앙이 자신들에게 실제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얘기다.

뉴질랜드는 지금 어떤 상황이냐구? 마지막 4부에서 다시 언급 하겠지만, 2, 30대 여성들의 반란으로 합리적이고 평등주의적인 남성 총리가 당선이 되었고 이전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제정되었던 법률은 대부분 수정된 상태가 되었다. 생각 있는 뉴질랜드 국민들은 이전의 상황들이 그들의 국가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소모적인 것이었는지를 느끼고 있다.

한국의 오늘날, 그리고 페미니스트

한국은 십 수 년 전에 뉴질랜드에서 있었던 ‘페미니즘’ 바람이 이제사 불고 있다. ‘워마드’ 같은 페미니스트들의 싸이트에서는 남성 누드모델의 알몸이 아무런 제지 없이 올라갔다. 실제로 워마드에는 하루에 남성 혐오 게시물이 평균 300여건 올라가고 있는 실정이다. 급기야 요즈엔 페미니스트들이 볼 때 남성의 권위를 대변한다고 여겨지는 가톨릭의 ‘성체 모독’까지 이어져 매스컴은 연일 시끄럽다.

유투브를 열어 보라. 해외에서 수많은 여성 연예인들과 지도층 여성들이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닙니다.’ 플랜카드를 들고 페미니즘에 반대하고 있다. 물론,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냥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사회에 투영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생각을 악이나 나쁜 것이라고 말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뉴질랜드의 예에서 보듯,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을 만드는 면에서 이미 ‘녹슨 칼’이라는 것이 증명되어 왔다. 최근 ‘미투’ 바람에 실려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데, 이렇듯 여성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과 페미니즘은 절대 동일한 것일 수 없다.

앞서 언급 했던 대로, 그것은 여성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일부의 사람들이 사용하기를 원하는 일종의 ‘도구’일 뿐이다. 일방적이고 기울어진 시각에서 다뤄지는 ‘평등’ 문제는 절대로 ‘평등’을 만들 수 없다. 항구적인 평화나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평온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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