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엔뷰] 근래 사회적 이슈들 때문에 페미니즘을 부르짖는 여성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같은 움직임은 한국의 이전 기성세대였던 기존의 베이비붐 세대에서 있어왔던 문제들을 꼬집는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유교문화 안의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던 남성 우선주의에 대한 항거의 성격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미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보편화된 베이비붐 이후 세대들에게...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현 세대들에게 페미니즘이 여성 스스로의 권리를 지켜주는 도구가 되고 있는지는 지켜볼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페미니즘의 부작용은 없는 것일까?

사실, 페미니즘은 양성평등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여성의 권리를 찾아가려는 투쟁과도 같은 이같은 움직임은, 모든 사회적 방향성이 그러하듯 한 쪽의 일방적 권리 주장으로 흐를 개연성도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근래 페미니즘관련 카페에 홍대 남성 누드 모델의 성기노출 사진이 아무렇지 않게 올라가고 피해자의 고통 호소에도 불구 희롱에 가까운 댓글들이 달리는 일들이 있었다. 청와대 게시판에서조차 관련자 처벌과 페미니즘 카페의 폐쇄를 청원하는 글이 올라간 걸 보면, 남녀를 불문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일과 관련해 남녀의 대결 구도로 상황을 몰고 가는 것은 분명 옳지 않음을 알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근래 올라오는 유투브 영상 등을 살펴보면, 해외의 유명 여성 연예인이나 사회 각층의 젊은 여성들 중심으로 나는 페미니즘을 반대합니다.”를 피켓을 들고 영상을 올리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그들이 양성평등을 반대해서가 아니다. 남성과 여성에게는 그들에게 어울리는 그들만의 자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그들의 또 다른 사회적 움직임이 시작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진 001 – 출처 유투브)

페미니즘은 도구인가? 목적인가?

사실,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양성평등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도구이다. 물론, 좋은 목적에 사용하려는 도구는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 아무리 그렇긴 해도, ‘도구본질이 동일시 될 수는 없는 문제이다. 도구가 본질과 혼동되는 그 순간, 사회적 갈등과 부작용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성평등 지수 1위 뉴질랜드

한 동안 성평등 지수에 있어서 부동의 1위에 있었던 나라가 있다. 바로 뉴질랜드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나라는 전 세계 최초로 여성부가 생긴 나라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 있어서 뉴질랜드는 꿈의 나라로 불리기도 했다. 과연, ‘페미니스트들이 이룩해 낸 뉴질랜드의 실제현실은 어떠할까? ‘꿈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의 파라다이스를 만들었을까?

자연 환경에 있어서만큼은 뉴질랜드는 지상낙원이라고 불릴 만큼의 천혜의 환경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페미니즘이 만든 성과는 아니다. 말 그대로 천혜의 환경인 것이다. 현재 뉴질랜드는 때 아닌 남자부족 현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 이유가 한국의 7, 80년대 처럼 남아선호같은 이상한 사회 현상 때문도 아니다. 뉴질랜드의 유전자가 여아 발생 빈도가 높은 특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도 아니다. 남여의 출생 빈도는 이 문제와 아무 관련이 없다.

뉴질랜드 페미니스트들의 권력 장악

뉴질랜드는 유전적 특징이 아니라, 전형적인 저출산 고령화 현상으로 여성의 절대 인구가 증가한 나라이다. 거친 사회생활 등의 이유로 남자들의 수명이 여성보다 짧다보니 생긴 결과인 것이다. 막노동판에서 일하고 외부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남자들의 사고사 빈도수가 여성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것은 당연하다. 거기에 더해, 사회생활로 인한 상대적 스트레스에 더 많이 노출되는 것도 역시 남성이었다. 남자들의 기대수명이 여성보다 짧은 것은 비단 뉴질랜드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 세계적인 추세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뉴질랜드는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이 한 때 꽤 오랫동안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 했다. 총리, 부총리, 법무장관, 경찰장관 등 4대 권력 기관장이 여성들의 차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그 자리를 연임하는 권력의 여성 집중화현상이 일어났다. 뉴질랜드 기성세대들에 있어서 보통 여성은 여성에게라는 말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될 정도로 여성들이 여성들에게 몰표를 주는 경향이 있다. 기성 세대들에게 여성으로서 여성에게 몰표를 주지 않는 것은 이상하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 고령화 기대수명의 불균형 때문에 전체 인구수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남성에 비해 훨씬 높고 남성표마져 성별과 상관없이 양분되다 보니 일찍부터 여성이 권력을 독점하게 될 토양이 뉴질랜드에 만들어 질 수 있었던 것이다. 언급 되었듯, 세계 최초로 여성부가 생겼고, 권력의 상대적 불균형으로 인한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 했다.

페미니스트들의 여성부 시작, 그리고 갈등

뉴질랜드에 여성부가 생기면서 벌어진 상황은 기존의 동양적 정서와는 다소 상이한 것이었다. 여성부는 출범 이후 이혼 장려정책을 펼쳤다. 또한, 이혼시에 재산분배 및 위자료를 특별한 이유 없이 여성에게만 더 많이 책정하는 법안이 가결 되었다. 양육권 소송에서 남성이 이길 확률은 0%에 가깝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남편이 잘 나가는 사업가이고, 여성은 백수라 하더라도 여성의 이전 삶이나 과실과는 상관없이 여성에게 양육권이 돌아가는 상황이 계속해서 연출되었다.

양육권과 관련해 여성에게 알콜이나 마약 문제가 있는 것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성의 외도로 이혼 문제가 불거졌다 해도 양육권은 거의 여성에게 돌아갔다. 사실, 이 문제의 진짜 핵심은 양육권 분배 금액에 있었다. 남자 전체 소득의 80% 정도를 양육비로 책정한 것이다. 정리해서 이야기 하자면, 여성의 과실로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양육권이 여성에게 돌아오고 남편의 월급도 거의 전액을 여성이 가져오게 되었다는 거다.

보트에서 쪽잠 자는 대기업 중역

너무나 슬프게도, 그러다 보니 뉴질랜드 최대 기업 중역이 과중한 양육비 때문에 보트에서 숙식을 하는 장면이 TV에 방영되는 일도 있었다. 논리는 매우 간단한 것에서 출발한다. [여성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의 의지로 이혼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여성이 남성보다 자녀 양육에 있어 적합한 존재이다. 자녀 양육에는 돈이 들어가는데 여성이 양육과 돈벌이를 함께 할 수 없으니, 남편의 월급 상당 부분은 여성에게 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매우 합리적인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문제는, TV에까지 나온 거대 기업 중역의 모습을 보고 뉴질랜드 여성들이 별 이유 없이 이혼을 요구하고 남편을 쫓아내는 일들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매달 받은 양육비로 관광객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백수남들과 살림을 차리는 현상까지 생겼다. 단지 한 두 사례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회 현상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남성은 엄청난 양육비를 빼앗기기 때문에 재혼은 엄두도 못내는 지경이 되었다. 20%의 월급으로는 자신을 추스르기에도 어려운 것이다. 평생 혼자 사는 것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페미니스트 국가 제도에 의해 월급의 대부분을 털리고 재혼조차 생각 할 수 없는 남성들이 사회에 넘쳐나게 되었다.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걸 알아도 남편은 말할 수 없었다.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이혼하지 않고 함께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어지는 칼럼을 통해 언급 하겠지만, 지금의 뉴질랜드는 사회적 자정 작용으로 인해 제도와 사회적 인식이 다시금 크게 변화 했다.)

뉴질랜드의 현상은 멀고 먼 남 일인가?

혹자는 월급의 80%를 요구했던 뉴질랜드의 예는 극단적인 예라고 말할지 모른다. 또한, 아무리 페미니스트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커진다 해도 한국 사회에선 이같은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들은 얼핏 보기에 매우 합리적으로 보이는 얼마의 정리와 생각들이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제도화 되고나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사진 002 – 출처 josemdelaa (오픈 이미지))

분명한 것은 페미니즘은 앞서 언급했듯 사회적 평등과 같은 것이 아니, 특정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한 도구라는 점이다. 도구는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흉기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음식을 만드는 칼이 언제 무기가 될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권력화 된 개인의 욕망이나 지향점은 쉽게 지저분한 민낯을 드러내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이어지는 칼럼을 통해 뉴질랜드가 어떻게 사회적 문제들을 극복했는지를 더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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