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시민단체가 활성화되어야"

[뉴스엔뷰] 안진걸 참여연대 금융센터 시민위원장은 지난 2017년 촛불 시민혁명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목소리를 내는 대소사에 일반 시민들보다 반발 짝 앞서 행동하는 일을 현재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검찰 조사를 받기도 하는 그가 소신을 굽히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직접 찾아갔다. 인터뷰 중에도 어딘가에서 그에게 계속 전화가 왔다. 정의를 위한 대소사에 동분서주하는 그는 바쁜 사람이었다. 안 위원장과의 인터뷰는 지난 12일 서울 종로에 위치한 참여연대 1층 카페에서 진행됐다. 

12일 참여연대에서 만난 안진걸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시민위원장 = 뉴스엔뷰

안진걸 참여연대 금융센터 시민위원장은 중앙대 법대 출신으로 대학시절부터 학생운동에 전념했다. 졸업 후 1999년 1월부터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참여연대에서 역할을 하고 있다. 참여연대는 정부, 특정 정치세력, 기업에 정치적 재정적으로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활동한다. 2004년부터 유엔경제사회이사회(ECOSOC) 특별협의지위를 부여받아 유엔의 공식적인 시민사회 파트너로 활동하는 비영리민간단체다. 최근 참여연대에서 사무처장 2년의 임기를 마친 그는 사무처 주요 책임자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됐지만 참여연대에서 해야 할 일을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은 안 위원장과의 일문일답.

-현재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을 맡고 있는데 이제 경제와 관련된 일에 더 중점을 두게 된 것인가.

경제금융센터 일 뿐만 아니라 민생운동본부, 노동사회위위원회에서 사회경제약자들의 노동존중, 노동기본권 등에 대한 해결 활동을 하는 동시에 많은 회원들, 시민들을 만나서 소통하고 있다. 더 강하고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는 시민단체가 활성화 되어 있어야 이루어진다. 이를 위해 시민들이 함께 독려해 줘야한다. 참여연대와 민족문제연구소 등 ‘내셔널 아젠다’를 다루는 NGO를 많이 도와주셨으면 좋겠다.

-대학시절 학생회장 출신이었다고 하던데 당시 특별히 기억할만한 일은 무엇인가.

소박한 운동권이었다. 총학생회 회장은 아니었고 법과대학 학생회장으로 학생회를 사랑하는 청년이었다. 지난 1991년 1학년 때 전국 91학번들이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 명지대 1학년 강경대 학생이 1991년 4월 21일 당시 등록금 시위를 하다가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다. 이후 5월, 6월 상반기 내내 전국 91학번들은 동맹휴업을 했다.

-법을 전공했는데 사법시험보다 사회운동에 더 관심을 둔 이유가 있나.

법이라는 한자를 보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흐른다. 글자처럼 상식과 정의에 맞게 가야하는데 법이 권력의 도구, 가진 자들의 착취 수단이고 사회적 약자들을 더 탄압하는 것으로 변질되는 것을 보면서 일찌감치 1학년 때부터 고시 공부보다는 사회운동이나 시민혁명 같은 것을 일으키기 위해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다. 요즘은 ‘법전을 열심히 볼 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가끔 후회가 될 때도 있다. 그래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의 모임’과 같은 좋은 분들이 변호사 많이 돼서 다행이다.

-예전에 한 TV 프로그램에서 흑석동에 자취하던 모습이 공개가 됐다. 지금도 흑석동에 거주하는가.

가난한 시민단체 상근자의 삶의 모습이 방송에 나간 적이 있다. 한동안 흑석동에 자취하다가 종로구 계동에서도 살았다. 2004년도에 결혼하면서 강동구 상일동으로 이사와서 산 지 15년째다. 이 곳이 제 2의 고향이다. 지역 NGO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본래 고향은 전남 화순이다.

-사회적인 이슈, 집회 등을 많이 이끌어가고 있다. 시민들과 함께하는 리더십의 기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리더십보다는 상식과 기본적인 정의에 근거해 행동하는 것이다. 사회가 따뜻하게 가야하는데 독재정권이 불의한 짓을 많이 하고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지 않았나. 초등학교를 다닐 때쯤부터 불의를 보면서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참여연대 전경 = 뉴스엔뷰

-10년 전 한·미 FTA 반대 촛불집회에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조직팀장’을 맡으며 참여했다. 당시 경찰에 의해 얼굴에 부상을 입었던 사진도 전해지고 있는데 당시 상황이 어땠나.

지난 2008년 6월 25일, 시민단체가 한·미 FTA 항의할 때 경찰이 중, 고등학생부터 할머니까지 시민들을 연행했다. 이를 경찰에 항의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한 쪽에서 쉬고 있었는데 경찰들이 뛰어와서 넘어뜨렸다. 얼굴을 아스팔트에 부딪쳐 부상을 입은 채로 연행돼 구속됐다.야간 집회는 당시 아예 금지가 됐었다. 신고를 하려고 해도 받아주지 않던 시절이었다. 법 테두리를 존중하려 촛불 문화제 형태로 진행했는데 불법집회로 기소됐다. 그런데 헌법재판소에서 야간집회금지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일반 시민들은 이후 무혐의처리가 대부분 됐는데 주최 측에 대해 미신고 집회를 개최했다며 검찰이 기소를 강행했다. 당시 경찰은 야간집회 신고를 아예 받아주지 않았다. 재판부가 그런 사정을 이해하지 않았다. 현재 집행유예 기간이다.

-당시 집회에 대해 ‘광우병 선동이다’라는 시각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현재 광우병이 생기지 않아서 시민단체가 선동을 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물론 당시 종합된 정보의 한계, 뉴스의 한계로 인해 과장될 수도 있었지만 30개월 이상의 특정위험물질(뼈, 척수)을 다 수입하겠다는 것을 막고 30개월 이하 뼈 없는 소고기만 수입하게끔 시민들이 목소리를 낸 것이기 때문에 지금 안전해진 것이다. 또 헌법 123조를 보면 국가가 지역경제와 농업을 보호해야한다. 농업과 농촌, 농민을 지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시대과제다.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공동대변인을 맡아서 집회의 중심이 되어 활동하셨는데 온 국민이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고 탄핵·조기 대통령 선거 등 외신도 놀랄 일들로 이어졌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란 예상을 당시 했었나.

2016년 10월 27일부터 촛불집회가 시작됐다. 국민들이 심상치 않은 것은 느끼긴 했으나 대규모로 이어지고 만장일치 탄핵, 촛불대선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다만 명백한 불의나 부당한 상황에 소박한 정의감으로 맞섰던 마음이 모아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촛불 시민혁명의 시민들이 적극적이고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미투’운동으로 확산되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 성평등은 물론이고 사회강자가 억압하는 일이 없어지고 직장갑질 등이 없어지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작년 참여연대 등이 ‘MB 다스 실소유주’ 의혹과 관련한 고발장을 접수하면서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MB 특유의 치밀함으로 수사가 쉽지 않을 것이란 시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민들이 직접 최고 권력자를 고발하기는 쉽지 않다. 시민단체가 용기를 내고 고발 한 것이다. 국민들이 다스나 도곡동 땅이 MB 소유라는 것에 대해 의혹을 품고 있다. 검찰도 내부적으로 조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국가권력을 이용해 사적 이익을 추구하고 반대자, 비판자를 탄압하는 등 제대로 안 밝혀진 범죄가 총체적으로 밝혀져서 다시는 권력형 비리를 이 땅에서 못하게끔 MB세력도 박근혜, 최순실 세력처럼 엄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신성한 힘이기 때문에 국민 아래에서 국민을 섬기는 방향으로 철저히 바뀌어야 한다. 그런 방향으로 개헌도 잘되고 지방선거에도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면 좋겠다.

-시민단체나 시민들과 관련해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한다면.

시민단체, 시민운동은 늘 시민들과 함께, 더 생활속으로, 더 민생속으로 들어가야 하면서도, 동시에 우리 사회의 기본과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재벌과 기득권 및 반 개혁 세력들을 감시하고 견제하고 투쟁하는 일도 마다하지 말아야 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런 시민단체들도 시민들의 응원, 후원, 지지, 참여, 연대가 없다면 힘을 잃을 수밖에 없기에 우리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늘 절실하다.

 

저작권자 © 뉴스엔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