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이중텐 교수의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뉴스엔뷰] 영화 ‘공자’에는 공자를 따라다니는 여러 제자들이 나온다. 그중 자로가 정치를 하려고 할 때 급한 성격을 탓하지만 그 성격 때문에 전쟁에 나아가 ‘자로’가 죽고, 안회는 추운 겨울 공자가 타고 있는 마차를 따라 얼음 위를 가다 변을 당한다. 안회가 탄 마차에는 공자의 말씀을 기록한 대나무로 엮은 자료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함께 얼음에 빠지자 안회는 허우적거리며 자료를 꺼내다 죽음을 맞이한다. 안회나 자로, 자공, 자하 등은 공자가 가장 총애한 제자였다.

영화 ‘공자(주윤발 역)’는 태어난 노나라를 떠나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춘추전국시대에 예와 인으로 대표되는 유가사상에 대해 그렸다. 결국 송나라, 진나라, 채나라, 상나라, 주나라, 위나라, 제나라, 초나라, 조나라 등을 전전하다 결국 노나라로 돌아오면서 영화가 끝난다. 공자의 일생을 두 시간에 일목요연하게 보여줬지만 공자를 이해하는 데는 다소 부족함이 있었다.

▲ 표지

하지만 중국의 역사학자이면서 고전해설가인 이중텐 중국 샤먼대학교 인문대학원 교수가 지은 <이중텐의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다>(보아스, 2015년 8월)는 제자백가의 첫 번째 인물인 공자의 철학을 쉽게 풀이했다. 특히 유가와 묵가의 논쟁, 유가와 도가의 논쟁, 유가와 법가의 논쟁 등 3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의 걸쳐 이루어진 대논쟁, 백가쟁명을 다루고 있다.

백가쟁명 한 가운데 공자가 있었고 백가쟁명은 그로 인해 시작해 그로 인해 종결됐다는 것이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 노나라에서 태어나 기원전 479년 73세로 세상을 등졌다. 어린 시절 곤궁하고 순조롭지 못한 삶이 오히려 훗날 그를 박학하고 다재다능한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논어>에는 제자 자로의 얘기가 42번, 안회와 자하는 21번, 자공은 28번이 나온다. 얘기를 많이 했다는 것은 친밀도가 높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공자는 학인으로서 호학(好學) 박학(博學) 활학(活學) 등을 실천했다. 15세 학문이 뜻을 두었고, ‘말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학문에 몰두하면 밥먹는 것고 잊고, 도를 실천함을 즐거워해 근심을 잊으니 늙어가는 줄 몰랐다’고 했다. 이렇게 늙어서도 배움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공자는 이렇게 호학을 충신보다 더 중요시 했다. 공자가 유일하게 제자 중에서 ‘호학’이란 말을 붙여준 사람은 안회이다. 공자는 전문지식이 아닌 박식함을 실천했다. 죽은 학문인 사학이 아니라 활약을 실천했다. 누구에게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는 지식이 많거나 기억력이 좋다고 해 대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가 과연 일이관지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도 했다. 일이관지는 근본적인 관점이나 근본적인 논리를 말한다.

공자가 다방면의 지식에 통달하고 이전의 문화유산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현실에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일반 백성의 힘든 인생살이와 험난한 세상사를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바로 공자가 정치(관리)를 하려고 한 이유이기도 했다. 공자는 정치적 청사진을 실행하기 위해 정치를 하려고 했고, 학문적인 주장을 실천하기 위해, 인생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를 하려고 했다. 학문을 통해 관리가 되는 방법론이 공자의 학문관리론이다. 공자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말과 행실을 정직하게 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행실은 정직하게 하되 말을 겸손하고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공자는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자신의 주장을 펼쳤지만 어느 곳에서 출로를 찾지 못했다. 정치에 참여하는 일도 뜻대로 되지 않았고 정치에 영향을 끼치는 일도 난관에 부닥쳤다. 그래서 공자는 육인(育人)의 인재를 양성하는 길에 나선다. 다시 말해 학생들을 길러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펼치게 만든다.

첫 번째 부류는 황포 1기로 공자가 35세 이전에 노나라에 머물 때 받아 드린 제자들이고, 황포 2기는 54세 전 제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올 때 받아드린 제자이며, 황포 3기는 55세에서 68세까지 열국을 주유할 때 얻은 제자들이다. 그 밖에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거나 기록에 나오지 않는 부류의 제자들도 있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3000제자에 72현인을 배출했다고 적고 있다고, 그가 학생을 모집할 때 어떤 조건이었을까. 육포 한 묶음만 주면 신분이나 지위, 지역이나 종족에 관계없이 공자의 제자가 됐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쳤을까. 공자의 교학은 사교[四敎-文(문) 行(행), 忠(충), 新(신)]와 사과[四科-덕행, 언어, 정사, 문학]였다. 문은 역대문헌, 행은 사회적 실천, 충은 도덕 수양, 신은 행위준칙이었다. 문학은 시가나 소설, 산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헌을 익히는 것이고, 언어는 화술과 변론이었다.덕행과 정사는 말 그대로이다.

결론적으로 공자의 학문은 도덕과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관리가 되는 길과 올바른 인간이 되는 길을 가르쳐 줬다. 하지만 자연과학, 기술, 국민경제와 민생, 통상 무역 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공자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럼 공자의 총애를 받은 제자는 누구일까. 학문하기를 즐거워한 안회였다. 공자의 말 일단식 일표음(一簞食 一瓢飮)은 안회를 두고 한 말이었다.

“회는 참으로 어질도다. 한 소쿠리(簞)의 밥과 한 표주박(瓢)의 물로 누추한 곳에 사는 것을 다른 이들은 견디지 못하는데 회는 그 즐거움을 누리는 구나, 회여”

단(簞)은 밥을 담는 대나무 광주리이고, 표(瓢)는 물을 담는 표주박이다. 일단식 일표음(一簞食 一瓢飮)은 말 그대로 생활이 지극히 빈곤하고 간단했음을 알 수 있다. 대다수 사람들이 견디기 힘든 처지인데 안회만은 그 즐거움을 누리면서 도를 행하고 학문을 할 수 있었던 것을 공자가 극찬한 것이다. 안회의 칭찬을 수궁하지 않는 제자가 자로이다. 하지만 공자는 자로도 좋아했다.

“해진 헌옷을 입고 여우나 담비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은 사람과 같이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는 유(由, 자로) 뿐일 것이다. 남들이 호화스럽게 살아도 시기하지 않고 자신이 간난해도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면 어찌 착하다고 하지 않겠느냐”

자로는 시경에 나오는 “남을 헤치려고도 아니하고 재물을 탐하려고도 아니하니 어찌 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구절을 늘 외우고 다니기도 했다고, 공자는 자로의 저돌적인 성격이 위험해 걱정을 하기도 했다. 기원전 480년 위나라에 출사한 자로는 내란이 발생해 위급한 사항에서 황손을 지키려다 비장하고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다. 공자가 나이 72세, 공자가 죽기 일 년 전의 일이다. 성인이기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 이었던 공자의 일생은 73세에 마감한다. 또한 이 책은 유가와 묵가, 도가, 법가 등 동양철학의 논쟁을 알기 쉽게 해석했다.

저자 이중텐 중국 샤먼대학교 인문대학원 교수는 지난 2006년 CCTV의 ‘백가강단’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초한지 강의를 시작으로 큰 인기를 얻었고, 삼국지 강의를 통해 고전 대중화의 길을 열어 중국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 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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